[442.포스투잇] "기계처럼 살았"던 차범근, 황무지에 길을 내다

류청 2021. 2. 23.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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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투=류청]

모두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게 있습니다.

21세기 한국 축구 최고 영웅인 차범근도 그렇습니다. 1979년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10시즌 동안 뛰면서 리그에서 98골을 터뜨리고, UEFA컵도 두 차례 들어올렸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아, 가끔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전 세계 유명 축구인들의 찬사도 들어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차범근이 뛰는 걸 직접 지켜본 세대는 아니었기에 기록이나 영상 그리고 증언 등을 통해 미루어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차범근의 실체에 접근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니 불가능했죠. 그래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차범근의 실체가 아닌 환상을 알고 있다고요.

포포투는 지난 9월호를 마지막으로 월간지 체제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2021년 1월호부터는 3개월에 한번 내는 계간지 체제로 거듭났습니다. 여러 주제를 다루던 방식에서 벗어나 한 가지 주제를 깊게 다루기로 했고요.

차범근을 첫 주제로 골랐습니다. 기록으로만 알고 있는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10년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그라운드 안팎과 한국과 독일의 시대 상황 그리고 도시까지 취재하며 차범근에게 가깝게 다가가려고 했습니다. 물론 직접 인터뷰도 했습니다.

가장 큰 성과는 차범근보다 1년 먼저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아시아 최초로 분데스리거가 된 오쿠데라 야스히코를 인터뷰 한겁니다. 오쿠데라는 1978-79시즌에 쾰른에 입단해 바로 분데스리가와 DFB-포칼을 모두 차지하며 더블을 달성했습니다. 쾰른 이후로는 헤르타베를린과 베르더브레멘에서 뛰었습니다.

오쿠데라는 현재 요코하마FC 회장인데 서면 인터뷰 요청에 성실하게 답했습니다. 통역을 맡은 구단 직원이 “저희 회장님이 정말 성심성의껏 인터뷰해주셨다”라며 놀랄 정도였습니다. 오쿠데라는 차범근을 청소년 대회에서 만나 처음 알게 됐다고 합니다.

“차범근은 모든 걸 갖춘 스트라이커였다. 차범근을 막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서도 골을 많이 넣는 공격수였다. 팀의 기둥이라고 느꼈다.”

차범근과 오쿠데라는 후배들이 유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닦았습니다. 그는 “지금 한국과 일본 선수들이 유럽에 많이 나가 있는데 어떤 생각이 드나?”라는 질문에 “이제 그런 시대가 왔구나”라고 느낀다고 했습니다. 진짜 그런 시대가 왔죠.

차범근이 처음 독일에 진출했을 때 도움을 준 한일동 씨의 아들 마쿠스 한이 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마쿠스 한은 어렸을 때 차범근이나 한국 축구인들이 집에 오면 자기 방을 내줬던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가장 인상적인 것은 프랑크푸르트 경기장에 걸린 태극기입니다. 최근 토트넘 경기하면 경기장에 태극기가 걸립니다. 당시에도 그랬다는 게 믿겨지지 않더라고요. 독일로 일하러 간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차범근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영표 강원FC 대표 이사는 차범근과 박지성 그리고 손흥민은 현지보다 한국이 더 박한 평가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과소평가 된다는 거죠. 그는 토트넘에서 디미타르 베르바토프가 했던 말을 언급했습니다.

“디미타르 베르바토프가 토트넘 홋스퍼에 왔을 때, 차범근 감독님이 자신의 롤 모델이자 우상이었다고 말하더라. 내가 생각하기에 차범근 감독님을 보는 전 세계의 시선은 우리의 평가보다 훨씬 더 높다.”

구자철도 차범근의 높은 위상을 잘 설명했습니다. 볼프스부르크에서 정말 어려울 때 차범근이 찾아와 펠릭스 마가트 감독과 대신 면담을 해줬다고요. 마가트 감독은 독일 축구계에서도 강한 카리스마로 이름이 높지만, 차범근이라면 면담이 가능했던 거죠.

당시 시대상을 볼 수 있는 일화도 많습니다. 사커 키드로 유명한 송기룡 대한축구협회 심판운영실장은 “1977년부터 분데스리가 중계를 했는데, 이후로 국내 축구 경기장에 들어오는 관중이 확 줄었다”라고 증언했습니다.

축구계에서는 분데스리가 중계를 하지 말야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고 합니다. 최근에도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나 챔피언스리그 본 팬들이 수준이 상당히 높잖아요. 정말 역사는 돌고 도는 것 같습니다.

넓은 길을 걷는 사람들은 그 길을 누가 냈는지 잘 모릅니다. 그 사람이 길을 개척하면서 한 고생도 잘 모르죠. 차범근은 “난 기계처럼 살았다. 즐거움을 잘 몰랐다”라고 했습니다. 그 덕에 우리는 유럽으로 난 큰 길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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