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훈에 忠 새기고 4대 연속 '봉군' 매년 1000여후손 백암재 참배제례 [남도종가의 재발견]

2021. 2. 2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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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는 2000년전 김수로왕-허황후의 한국-인도 국제결혼 이후 여러 면에서 너무도 유명한데, 영암에 터 잡은 사군파 양무공 종가는 중세 구국의 주역들이 많다.

충성 충(忠)자가 가훈에 들어있을 정도로 대의를 존중하는 가풍으로 대종가 단합이 잘 되는 곳이 사군파 및 양무공 종가다.

김완이 아버지 김극조의 장례를 치르면서 상여 길을 가로막던 호랑이 입에서 뼛조각을 꺼내주었고, 호랑이가 옷자락을 물고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가서 아버지를 모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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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 사군파 양무공종가
대의 존중 가풍 이어온 조선 명문
김해김씨 사군파 양무공종가.

김해김씨는 2000년전 김수로왕-허황후의 한국-인도 국제결혼 이후 여러 면에서 너무도 유명한데, 영암에 터 잡은 사군파 양무공 종가는 중세 구국의 주역들이 많다. 충성 충(忠)자가 가훈에 들어있을 정도로 대의를 존중하는 가풍으로 대종가 단합이 잘 되는 곳이 사군파 및 양무공 종가다.

양무공은 고려후기 감무 벼슬을 지낸 중조 김익경의 9세손 김완(1577~1635) 장군의 시호이다. 충무공 휘하 동명이인 무관과는 다르다.

아버지는 광양현감을 지냈던 김극조(1534~1591)로 모반사건 관련자와 친하다는 이유로 투옥됐다가 무혐의 처분받았지만 출옥직전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양무공 김완은 모함한 자에 대한 복수와 부친의 명예훼복을 위해 권토중래했다.

20세에 무과급제후 만호가 된 천재무관 김완은 호랑이 장군이다. 어머니 천안 전씨는 호랑이가 달려들고, 바닷물이 치마폭으로 몰려드는 꿈을 꾼뒤 김완을 낳았다고 한다. 인근 몽해(꿈속 바다)마을, 구음(꿈,九音표기는 음차로 추정) 평지가 이 꿈과 무관치 않다. 김완이 아버지 김극조의 장례를 치르면서 상여 길을 가로막던 호랑이 입에서 뼛조각을 꺼내주었고, 호랑이가 옷자락을 물고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가서 아버지를 모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양무공은 정충신 장군과 함께 이괄의 난을 진압해, 진무공신에 책록되는 금궤철권을 받았고 학성군에 봉해졌다. 황해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될 때 임금에게서 영정(보물 1305호)도 받았다. 김완의 묘지 앞에는 애마의 무덤(駿馬塚:준마총)이 있어 눈길을 끈다. 아버지 원수를 갚으려는 의지가 서린 ‘복수 다리’, 피바위(血岩) 스토리도 전해진다.

10세손 김여수(1600~1670)는 변방 오랑캐를 잘 다스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서 ‘해성군’에, 11세손 김세기(1631~1685)는 임금으로부터 명궁을 인정받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서 ‘학림군’에 봉해졌다. 4대가 연속 봉군되는 기록을 작성한 것이다. 후손들은 남한의 선조 추모는 물론이고 북한 개성에 묻힌 선조들을 추모하여 매년 백암재(서호면)에서 1000여 후손들이 참배하는 제례를 거행한다. 함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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