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시화기행>좋은 가문도 빛나는 학벌도.. 그녀에겐 '콤플렉스'였다
■ (64) 파리와 철학자 시몬 베유
자기 주장과 일치된 삶 중시
평생 청교도적 사회철학 몰입
伊여행 뒤 사회주의 관점 접목
美에선 경제 자본주의에 심취
허약한 몸으로 노동자 생활
폐결핵 탓 서른넷에 生마감
‘파리는 날마다 축제’. 헤밍웨이는 세상을 뜨기 얼마 전 이 한 권의 가벼운 기행 에세이를 썼다. 너무 많은 것을 가져 오히려 공허하고 우울했던 그는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파리 시절을 그렇게 회상했다.
하지만 정말일까. 그 도시는 축제만 있고 아예 고통과 절망은 없는 것일까. 그렇게 몽롱한 꿈의 도시처럼 허공에 떠 있는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한 기록에 의하면 파리시의 고통지수는 행복지수 못지않게 높다. 노숙자, 부랑자도 많고 예술의 도시답게 걸인 연주자며 길거리 화가도 많다. 특히 식민지배를 했던 알제리나 튀니지, 모로코 등지에서 식솔을 데리고 무작정 상경한 이방인들에게 파리는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도시다. 그래서 일찍부터 일부 상류층, 지식지배계층 사람들은 그 기층민들의 비참한 삶을 보듬지 않고서는 파리가 결코 축제의 도시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크게 흔들릴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생겨난 까닭일 수 있겠다. 사회로부터 일정한 신분에 따른 혜택을 받는 대신 그 혜택을 약자를 위해 되돌려줘야 한다는 의식이 생겨났고 나아가서 ‘톨레랑스’로 파리에 모여드는 식민지 사람들이나 이교도들을 파리시민으로 인정하고 관용의 정신으로 품어야 한다는 의미를 새기게 된다. 적대와 갈등으로 유혈 낭자한 혁명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대감과 동지애의 ‘프라테르니테’로 가야 한다는 무언의 규약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석학 이어령 선생에게 들은 내용이다.
어쨌든 이러한 의식을 뒷받침한 것이 철학이었다. 프랑스 철학은 그래서 독일식 관념론적 흐름과는 궤를 달리해 다분히 삶의 철학이자 실제적이다. 그리고 장폴 사르트르에서 베르나르 앙리 레비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명제는 가끔 정치와 닿으면서 테제 혹은 안티테제로서의 힘을 발휘한다. 문학 또한 귀족과 노동자의 세계를 오가며 양쪽의 가치관을 함께 떠받드는 쪽이 유난히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오노레 드 발자크나 빅토르 위고, 알베르 카뮈, 앙드레 지드 같은 사람들이다. 그와 함께 작가 스스로는 럭셔리한 삶을 누리면서도 심정적으로만 동조하는 프랑스형 ‘오렌지 좌파’ 지식인이 유난히 많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탈리아식 천국을 향한 종교적 사랑보다는 실제적 삶을 사랑과 유대의 끈으로 묶어 파리를 일견 ‘축제의 도시’로 보이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파리는 시각예술의 도시이자 동시에 여성의 도시이기도 했다. 밀라노가 이탈리아 패션의 본류라고는 해도 멀리 로마시대로부터 비롯됐다는 우월적 남성미의 전통이 현대에까지 남아 있는 것과는 비교된다. 그 도시에서는 여성복점보다 남성복점이 두세 배나 많고 거의 모든 백화점도 남성복부터 시작해 여성복 순서로 올라간다.
파리는 어떤가. 압도적으로 여성복 매장이나 액세서리점이 많고 열에 한두 개 정도 남성복점이 있을까 말까다. 그 파리에서 카페에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여성을 대했을 때 그곳에 왔던 100년 전의 여류화가 나혜석 같은 사람이 얼마나 놀랐을까.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조국은 여성의 복숭아뼈만 보여도 망측하다고 비난받던 사회였기 때문이다. 한낮에 시시덕거리며 맨다리를 드러낸 젊은 여자가 남자와 맞담배질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힘센 여성의 도시 파리의 지성계에서는 시몬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시작하는 두 힘센 여자가 특히 유명했다. 여성은 두 번 태어난다고 선언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 그는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으로 유명했고, “결혼은 여성의 희생을 강요할 뿐이고 미친 짓이며 장차 팍세(계약 동거)로 전환함이 맞다”고 해 파리 젊은이들의 결혼과 출산율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데 기여한다. 그 대찬 여자는 정신은 사르트르에게서, 육체는 연하의 여인에게서 취하며 오래 살았다.
그에 반해 또 한 사람의 시몬인 시몬 베유는 미모, 지성, 천재성을 함께 타고난 여자였지만 그 가는 길이 판이했다. 보부아르와 파리 고등사범학교 동기생으로 학창시절 수석을 다툴 만큼 우수했다고 전해지는데, 늘 대중 사이에 있는 보부아르를 ‘속물적 지식인’이라고 경멸했다.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와 함께 군중의 시선 속에 있는 것을 즐겼던 데 반해 베유는 청교도적 사회 철학자였다. 그는 평생 자신이 내세우는 주장과 스스로의 삶이 일치하는가에 대한 냉철한 관찰자였다. 평생이라 해야 기껏 서른네 해의 짧은 삶이었을 뿐이지만. 부유한 의사 집안에 머리 좋고 미모도 타고난 금수저였지만 일찍부터 사회주의와 노동, 계급 같은 것을 연구 주제로 삼으면서 스스로 위장취업 아닌 전문 노동자가 돼 들판과 공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했다.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처럼,
그녀는 좋은 가문과 빛나는 학벌을 오히려 콤플렉스로 느꼈던 것 같다. 그녀는 또한 여행을 통해 비좁은 파리를 벗어나 세계관의 확충을 시도했다. 예컨대 자기가 사는 삶의 골목길을 나와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는 광장에 서려 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명작 ‘최후의 만찬’과 산타마리아 대성당의 ‘조토’ 그림을 만난 후 신적 영감에 도취했고 자신의 사회주의적 관점을 이에 접속시켰는가 하면, 인도를 여행하면서는 우파니샤드의 고대 인도철학에 심취하고, 뉴욕 여행 후에는 또다시 그녀의 사회철학 노선이 경제 자본주의와 악수하는 등의 다양한 문명과 세계관을 체험한다.
그녀는 “가장 인간적인 문명은 육체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문명”이라며 노동을 신성시했고 입으로만 떠들고 머리로만 사유하는 문자 철학에 대해 폄훼했다. 신성한 육체의 노동과 함께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날뛰는 정신은 제어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해악이 된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러나 정작 유난히 허약한 육체를 타고났던 그녀는 결국 그 광대한 지식을 육체로 감내하지 못한 채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과 함께하다가 폐결핵으로 요양소에서 생을 마감한다. 탄광에서 광부들과 함께 빵을 먹고 희미한 주점에서 그들과 밤늦도록 어울려 술잔을 주고받았지만 허약한 그녀의 육체는 그들의 억센 근육과 어울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계곡에 핀 한 송이 청초한 수선화 같은 짧은 삶은 그렇게 ‘축제의 도시’가 아닌 ‘고통의 도시’ 파리의 그늘진 곳에서 지게 된다.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시몬 베유(Simone Weil·1909~1943)
민중해방 부르짖은 ‘파리의 체 게바라’
차고 맑은 지성, ‘파리의 여자 체 게바라’로 일컬어지는 시몬 베유. 그러나 가슴에 용광로를 품은 여인이었다. 불과 서른네 해를 사는 동안 이 철학자는 광부, 노동자들과 실제로 삶을 함께했다. 세계 민중의 해방을 부르짖었지만 인간에 대한 파괴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며 반나치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기도 했다.
약하고 병든 자를 위해 흘리는 예수의 눈물 없는 모든 주의, 주장, 선동은 거짓이며 또 하나의 탐욕이라고 말하며 신적 사랑의 눈길로 약자를 보듬는 것이 지상에서 지식인이 할 최후의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녀가 유대인 가정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자란 유년시절의 영향으로 보인다. 부유한 의사의 딸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약자와 함께해야 한다는 자신의 투철한 사상을 실천으로 옮겼다. ‘자유와 사회적 억압의 원인들에 대한 성찰’ ‘중력과 은총’ 등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거의 모두가 사후에야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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