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마운스토리] 조령 옛 지명은 '초점草岾'.. 영남대로 핵심 관문
글·사진 박정원 선임기자 2021. 2. 23. 09:31
김시습·이이 등 수많은 선비들 자취 남아.. 신라의 오령 중 하나
조령鳥嶺은 현재 조령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옛날에는 산보다 고갯길로서 더욱 유명했으며, 이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도 매우 많다. 이 사건은 역사적 지명으로 연결된다.
신라의 오령은 조령·죽령竹嶺·화령化嶺·추풍령秋風嶺·팔량령八良嶺으로 삼국시대 때 신라가 고구려와 한강으로 진입하는 관문역할을 한 고갯길들이다. 조령을 넘어가면 바로 충주가 나오고 한강 상류로 연결된다. 조령은 또 죽령과 함께 두 고개의 남쪽에 있는 경상도를 영남으로 불러 영남이란 지명의 유래가 됐다. 다시 말해 조령·죽령 이북은 충청도, 남쪽은 경상도로서 두 지역의 경계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조령과 죽령은 예로부터 한반도의 남북을 잇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통로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령은 매우 험준한 고갯길이었다.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시문집 <번암집>에 실린 ‘조령’이란 시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남쪽에 극히 험한 고개 있으니 炎維有絶險/ 조령은 천하에서 으뜸가는 곳 鳥嶺天下獨/ 태곳적의 쇠가 닳아 절벽 이루고 壁磨太始鐵/ 두터운 지맥 끊겨 벼랑이 됐네 崖絶厚地脉/ 지난 날 신라와 고려시대에 新羅及高麗/ 하늘이 남과 북을 갈라놓으니 天以限南北/ 벌벌 떨며 공중에 자도 만들고 凌兢斲飛棧/ 기어올라 북극성 뚫으려 해도 仰攀穿斗極/ 신령한 도끼날이 도리어 무뎌 神斧力反脆/ 단번에 돌 모서리 깎지 못하여 未遽剗石角/ 숲에서는 음산한 기운 풍기고 林木集送氣/ 자주 하늘 컴컴해져 비를 뿌렸네 往往天潑黑 (후략)//’
채제공보다 훨씬 앞서 조선 초기 인물인 김시습(1435~ 1493)도 조령을 지나며 ‘유조령 숙촌가 踰鳥嶺 宿村家’란 시를 남겼다.
‘새재는 남북과 동서를 나누는데 嶺分南北與西東/ 그 길은 아득한 청산으로 들어가네 路入靑山縹緲中/ 이 좋은 봄날에 고향에도 못 가는데 春好嶺南歸不得/ 소쩍새만 울며불며 새벽바람 맞는구나 鷓鴣啼盡五更風//’
이와 같이 조령은 예로부터 남북과 동서를 가르는 험한 고갯길로서 남에서 북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죽령이 그 역할을 했으나 조선 들어 한반도에 8대 대로를 개통하면서 영남대로의 핵심 관문으로 떠올랐다. 이전에는 죽령과 계립령 하늘재가 주요 통로였다. 죽령은 이미 알려진 대로 신라 죽죽장군이 고구려를 무찌르기 위해 넘었던 최초의 길로서 <삼국사기>에 자세히 소개된다.
특히 왜군이 한반도를 침범해 왔을 때 신립 장군이 조령관문을 버리고 남한강을 배수진으로 삼아 충주 탄금대를 방어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뿐만 아니라 많은 개인 문집에서도 잘못된 방어라고 질책하는 항소가 수십 차례 등장한다.
조령은 남북·동서 가르는 고갯길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편에 ‘조령산성은 조령의 세 성으로, 하나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있는 조령관이고, 하나는 응암 북쪽에 있는 중성이며, 하나는 초곡에 있는 주흘관이다’라고 나온다. 신립 장군이 철옹성 같은 조령의 3개 성을 버려 지금까지 그 명성에 누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임란 이후에도 그 3개의 성은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제1 관문(주흘관), 제2 관문(조곡관), 제3 관문(조령관)이다.
조선시대까지 조령은 하나의 고갯길로 봤을 뿐 산으로서의 개념은 부각되지 않았다. 현대 들어서 조령에 산을 붙여 조령산(1,026m)이라 명명하게 됐다. 조령산의 범위는 제3 관문인 조령관에서 이화령까지의 능선을 말한다. 조령산과 동쪽으로 마주보는 주흘산이 예로부터 문경의 진산으로 대접받아 왔다. 문경의 북쪽을 완전히 감싸는 산이 바로 주흘산과 조령산인 것이다. 그리고 넘어가면 충청도로 연결된다.
문헌이나 기록에는 조령이 여기저기 등장하는데 16세기에 발간된 <동람도>에는 조령이란 지명이 어디에도 없다. 조령이 위치할 만한 장소에 ‘草岾초점’이란 명칭만 보인다. 흔히 알려지기로는 옛날부터 ‘새도 넘나들기 험한 고개’라 하여 조령으로 사용하다가 조선시대 들어서 지명을 한글로 바꾸면서 새재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초점이 과연 무슨 뜻인가?
이에 대해 한국지명학회 회장을 지낸 전남대 국문과 손희하 교수는 “새도 넘기 어렵다고 해서 새재라 했다는 설명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에 그만한 높이의 고개는 매우 많다. 우리말에서 ‘새’는 원래 풀을 의미한다. 채소의 옛말이자 방언인 남새밭이나 초가집을 말하는 샛집, 그리고 억새 등에 포함된 새는 전부 풀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조령에만 풀이 많았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고갯길에는 다 풀이 있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 손 교수는 “새는 풀을 의미할 뿐 아니라 사이란 뜻도 있다”고도 덧붙였다. 조령과 동쪽으로 마주보는 주흘산이 동서로 뻗어 있는 중간에 있는 험한 사잇길이었기 때문에 새재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어느 의미로 사용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언어는 당시 편리한 대로 사용하고, 문자는 형식을 갖춰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조선시대 영남대로를 개통하면서 새로 난 신작로란 의미로 새재로 명명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손 교수는 결론적으로 “민간에서 말을 할 때는 새재라 쓰고, 문장으로 남겨야 할 때는 초재 또는 초점, 조령으로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앞에서 언급한 조선 초기 김시습의 시나 서거정(1420~1488)의 시에서 찾을 수 있다. 15세기에 쓴 그의 시에 ‘조령’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만경萬景의 높은 누각 반공에 서 있는데, 올라와 보니 아름다운 흥치를 금하기 어렵구나. 달천의 푸른 물은 금탄을 접하였고, 조령 푸른빛은 월악을 연하여 높도다. 물결에 뜬 백구와는 맹서가 친숙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황학은 부를 지어 부를 만하구나. 남북으로 보내고 맞는 일이 어느 때나 끝나리. 산은 스스로 푸르고 물은 스스로 아득하도다’라고 노래했다. 서거정은 또한 ‘조령의 남쪽은 본래부터 이름난 곳과 경치 좋은 땅이 많다고 일컫는다’는 문장도 남겼다. 따라서 당시에 문장에서는 조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새도 넘기 힘든 고개’란 유래는 근거 없어
여기서 떠오르는 의문은 ‘새鳥와 관련된 어떤 유래도 없는데 어떻게 새재가 새가 넘기 힘든 고갯길이란 설명이 나왔을까’가 제기된다. 이에 대해서 초점이나 초곡에서 새재란 지명을 사용하다가 이후 새를 한자화하면서 원래의 풀草이나 사이를 뜻하는 의미는 상실되고 ‘鳥’의 의미를 가져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로부터 새가 넘기 힘든 고개란 지명유래는 전혀 사실과 맞지 않은 설명인 것이다.
어느 명칭이 시대적으로 앞섰는가의 문제는 지명이 혼재된 상태로 등장하기 때문에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언어는 사람들이 편리한 대로, 시대를 넘어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16세기에 발간된 지도 <동람도>에는 초점 외에 어떤 지명도 보이지 않는다. 이어 1682년 제작된, 즉 17세기 발간된 <동여비고>에서는 조령으로 표기하면서 ‘일명 초현草峴이라고도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18세기와 19세기 발행 제작된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는 조령만 표시돼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조선시대 이전에는 초점으로 주로 사용하다가 17세기 들어서 조령과 초현을 혼용해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부터는 조령으로 굳어진 게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 제작된 <청구요람>에서는 조령이란 지명만 있고, 초점이나 초현은 아예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 인근에 초곡草谷이란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뤄봐서 원래 이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은 ‘草’와 상당히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고지도나 문헌을 통한 기록으로 볼 때 조령이란 지명은 시기적으로 초기엔 초점, 초현으로 사용하다가 점차 조령과 새재를 혼용해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이와 같이 조령산은 산으로서 가치보다는 조령이라는 고갯길로서 예로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반면 문경의 진산 주흘산은 예로부터 고지도와 문헌에 등장하는 명산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편에 ‘주흘산主屹山은 현의 북쪽에 있는 진산이다. 새재鳥嶺는 현의 서쪽 18리에 있으며, 연풍현의 경계에 있다. 세상에서는 초점草岾이라고 부른다’고 나온다. 또한 ‘사직단은 현의 서쪽에 있으며, 주흘산사는 산사에 실려 있기를 봄·가을에 향을 하사하여 소사小祀를 지낸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가 주재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낸 산은 예로부터 명산이었다.
<세종지리지> 경상도편에서도 ‘경상도에 5대 명산이 있으니, 문경 주흘산, 봉화 태백산, 진주 지리산, 상주 사불산四佛山, 성주 가야산이다’라는 정도로 주흘산을 문경의 진산과 경상도의 명산으로 꼽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남긴 <연려실기술> 지리전고에 한반도 지리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용도 조령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곤륜산(중국의 전설 속의 산) 한 줄기는 큰 사막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동쪽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고, 이곳으로부터 크게 끊어져서 요동 들판이 된다. 들판이 건너가서 불쑥 일어난 것이 백두산이 되어 여진과 조선의 경계에 있으니 이것이 곧 <산해경>에 이른바 불함산(우리의 백두산)이다. (중략) 남쪽으로 뻗쳐서 축곶령·금강산·진부령·설악·한계산이 되고, 오색령·오대산·대관령·두타산·백복령이 되었으며, 서쪽으로 꺾어져 태백산이 되고, 서남쪽으로는 우치牛峙·마아령·소백산·죽령이 되고, 또 불쑥 솟아서 월악·주흘산·조령·의양산·청화산·속리산·화령·추풍령이 되고… (후략)’
백두대간 한 능선… 겨울산행은 이화령이 무난
조령은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 능선 중의 한 지점이라는 설명이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중심 산줄기로서 어느 한 능선도 쉽게 넘을 수 있는 곳이 없다. 조령도 마찬가지이다. 1,000m가 넘는 고도뿐만 아니라 밑에서 봐도 암봉들이 우뚝 우뚝 솟아 있다. 특히 겨울엔 더욱 쉽지 않다. 눈이라도 내리면 신선암봉 루트는 매우 위험하다. 암릉으로 연결된 코스라 눈이 쌓여 있거나 얼음이 얼었을 경우 전문 등반가가 아니면 갈 수 없을 정도다.
따라서 겨울에는 문경새재길, 즉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6.5km를 올라가 조령산 줄기인 깃대봉까지 갔다가 원점회귀로 돌아오는 코스가 무난하다. 문경새재길을 즐기면서 조령관문까지 누구나 즐길 수 있기 때문에 2월의 산으로 선택했다. 이 코스는 특히 여름에 더 좋다. 새재길 따라 옆으로 새재계곡이 있어 예로부터 선비들이 음풍농월하거나 과거시험 보러 가는 도중 쉬었다 가던 정자가 지금도 남아 있다. 용추·조곡약수 등 새재계곡에 있는 명소는 어디 내놔도 전혀 뒤지지 명승지다. 1966년 조령 3개의 관문, 즉 문경새재가 사적 제147호로, 1981년에는 문경새재가 도립공원으로, 또 2007년에는 명승 제32호로 국가문화재로 각각 지정됐다.
이화령에서 조령산 정상으로 가는 코스는 겨울에도 갈 만하다. 이화령에 주차하고 조령산까지 3km밖에 안 된다. 약 2시간 소요. 왕복 4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문경새재에서 중간에 조령산으로 올라가는 코스가 있으나 겨울엔 너무 험해서 통제한다. 새재계곡 마당바위에서 조령산 정상까지 3km에 약 2시간 소요. 제2관문 지나 조곡약수에서 신선암봉 직전으로 올라가 조령산까지 가는 코스도 있으나 역시 겨울엔 통제한다. 너무 가팔라서 눈이라도 조금 쌓여 있으면 아예 길이 없어질 정도다.
주능선으로 가는 등산로인 조령산 제1코스는 제3관문~깃대봉갈림길~신선암봉~조령산~이화령까지는 총 8km에 6시간 이상 소요되며, 겨울에 통제하는 제2코스는 제1관문~마당바위~조령산~이화령은 7.5km에 4시간 이상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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