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숨은 명산] '二水三山 고장' 영천의 진산 보현산
글·사진 황계복 부산산악연맹 자문위원 2021. 2. 23. 09:30
엄마가 아이 안은 형세, 母子山으로 불리기도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좀처럼 눈 쌓인 산을 보기가 힘든 남녘에서 거센 눈보라를 맞았다. 보현산普賢山(1,126m)은 고도가 1,000m를 넘다 보니 겨울이면 십중팔구 눈이 있다. 모처럼 눈발이 휘날리는 산릉을 밟는 행운을 누렸다.
영천은 예로부터 이수삼산二水三山의 고장이라 했다. 고을의 진산鎭山인 보현산을 발원지로 동서에 자호천과 고현천이 흘러 금호강을 이루므로 이수二水라 한다. 또 북쪽의 보현산, 동쪽의 운주산雲柱山(806m), 서쪽의 팔공산八公山(1,193m)을 가리켜 삼산三山이라 말한다. 이처럼 보현산은 영천을 상징하지만, 실상은 영천시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 포항시 죽장면의 경계를 이룬다.
보현산은 영양 일월산(1,219m), 팔공산 다음으로 경북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그렇다 보니 옛 문헌이나 고지도에 많은 기록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지리서인 <산경표>에 ‘보현산은 서쪽으로 왔다. 일명 모자산으로, 청송 남쪽 32리, 신녕 북쪽 50리, 영천 북쪽 90리에 있으며 응봉, 기룡산, 방립산에서 3개의 산줄기를 분기시킨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낙동정맥에서 가지를 형성한 보현지맥이 다시 선암지맥, 기룡지맥, 팔공지맥 세 개의 산줄기를 분기시킨다는 뜻이다.
보현산의 산세는 방패나 삿갓 모양으로 부드러우며,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세라 하여 모자산母子山 또는 자모산慈母山이라 했다. 그러나 산의 장중함이 거대한 코끼리를 닮아 보현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불가에서 코끼리를 상징하는 보살이 ‘보현’이다. 특히 불교적 색채는 정각리 3층석탑, 공덕동 3층석탑, 묘각사, 거동사 등등의 주변 유적과 산자락의 정각리正覺里, 법화리法華里, 보현리普賢里, 공덕리功德里, 탑골塔谷, 절골 등의 지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천문대 건립 후 별빛천지로 변모
산행은 원점회귀로 하산 지점을 생각해 정각삼거리 버스정류장에서 시작한다. 절골~정각사~시루봉(1,124.2m)~보현산 정상~주차장~보현지맥 갈림길~가지재~작은 보현산 갈림길~갈미봉(786.5m)~별빛 누리길~보현산 천문과학관~정각삼거리 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오는 약 12㎞의 코스다.
절골로 오르는 정각리 일대는 온통 별빛 천지다. 가게의 간판이며 쉼터, 문화센터, 심지어 표석마저도 별빛을 앞세운다. 모두 보현산에 천문대가 세워지며 변화된 풍경이다. 정각1리(절골) 버스정류장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가정집 같은 보현사도 보인다. 언덕 위 산자락에는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 초기 양식으로 전해지는 정각리 3층석탑이 서 있다. 등산로 안내판 뒤 정각사 방향으로 향한다. 작은 암자 같은 정각사 입구를 지나면 돌탑과 이정표(법용사 4.7km, 천문대 2.0km, 시루봉 1.7km)를 만나고 뒤이어 상수원 보호용 철망 울타리를 끼고 오르면 본격적인 산길이 열린다.
시루봉까지는 뚜렷한 외길의 등산로에 곳곳에 선 이정표로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다만 능선에 이르기까지 경사가 무척 가파른 비탈길이다. 서두르지 말고 쉬엄쉬엄 오르는 것이 좋다. 등에 땀이 밸 무렵 능선 길에 닿으면서 비탈진 경사도 완만하게 수그러든다.
고도를 높일수록 안개에 눈발까지 날린다. 전망 데크에 이르렀지만 안개가 자욱해 가까운 천문대는커녕 주변 산릉도 구분하기 어렵다. 시루봉으로 오르는 산길은 제법 널찍해졌다. 기온이 떨어지다 보니 안개의 물방울이 나무에 스치며 상고대를 만들었다. 상고대가 핀 숲길은 안개까지 자욱해 몽환적인 분위를 연출한다.
천수누림길 데크로드 입구의 웰빙숲 관찰전망대를 지나 시루봉(1,123.9m)에 닿는다. 산의 형태가 떡시루를 닮았다는 시루봉은 전망이 뛰어나다. 날씨만 좋다면 팔공지맥의 팔공산, 화산은 물론 멀리 선암산, 금성산을 비롯해 가까이는 부약산 부처바위, 보현산댐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인 셈이다.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있는 이곳은 일몰 감상의 포인트이기도 하다. 안개 속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시루봉에서 이어지는 산길은 한동안 보현지맥이자 청송군과 영천시의 경계이다. 넓은 산길은 이내 한국천문연구원 보현산 천문대에 이른다. 매년 열리는 보현산 별빛축제는 지난해 코로나19로 10월에야 온택트Ontact 축제로 진행했다고 한다. 이 천문대가 생기면서 산 정상까지 도로가 개설된 이후 산꾼들은 심드렁하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을 편안하게 오를 수 있지만 산꾼들에겐 그리 탐탁한 일이 아닌 듯하다. 산꾼은 땀을 흘리며 정상에 올라야 만이 성취감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정상으로 향한다.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망원경동 옆으로 오른 보현산 정상에는 청송군에서 세운 정상석이 자리한다. 여전히 걷히지 않는 안개 속에 전망은 볼 수 없지만 상봉 주변의 상고대가 환상적이다. 표석 뒤쪽으로 난 숲길 따라 갈미봉으로 향한다. 이파리를 떨어뜨린 나무는 삭풍을 견디며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다.
보현지맥에서 기룡지맥으로 환승
천문대 주차장을 가로질러 내려서면 넓은 터의 묘지군이다. 나무도 숲길도 엷게 내려앉은 눈으로 새하얗다. 갈림길에 ‘기룡지맥 분기점 준·희’란 표지판이 걸렸다.
보현지맥과 기룡지맥이 갈리는 분기점인 동시에 영천시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 포항시 죽장면의 경계점이기도 하다. 이웃 면봉산으로 뻗어가는 보현지맥을 벗어나 이제 기룡지맥을 따르게 된다. 동시에 포항과 영천의 경계선을 따라가는 셈이다. 능선 길은 곧 천문대로 연결되는 도로를 만나지만 두세 차례 건너질러 다시 숲속 능선 길로 잇는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안개도 서서히 걷힐 무렵 임도준공기념 식수비가 있는 가지재에 닿는다. 정각리에서 포항시 죽장면 두마리로 넘어가는 임도의 고갯길이다.
길을 건너 이정표 옆 넓은 산길로 진행한다. 곧이어 닿은 곳은 작은 보현산 갈림길. 이정표에는 ‘시 경계구간 832m 포항시 산악구조대’란 표지판도 걸렸다. 이제 산릉은 포항과 영천의 경계를 벗어나 영천시 자양면과 화북면의 경계선을 따른다. 널찍하고 부드러운 산길에 이정표까지 있어 한결 수월하다. 웰빙숲 입구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면 왼쪽으로 시야가 확 트이는 조망터에 이른다.
예전 온돌방에 설치하는 구들돌을 채석하던 곳으로 누군가 정성스레 쌓은 돌탑도 보인다. 건너편 소잔등 같은 순한 능선 끝에 두루뭉술하게 솟은 작은 보현산과 건너편의 수석봉, 운주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곧장 한 굽이 올라서면 갈미봉曷味峰(786.5m)이다. 이정표를 겸한 표지목이 서 있는 이 봉우리를 인근 주민들은 까치봉이라 일컫는다. 전망도 없을뿐더러 별다른 특징은 없다. 갈미봉에서 하산길은 거동사와 천문과학관으로 내려서는 두 갈래로, 오른쪽 기룡지맥 길을 따라야 한다. 뒤이어 만난 바위봉에서 조심스레 내려서면 임도처럼 넓은 길이다.
낙엽이 푹신한 숲길에 벤치가 보이고 산릉을 돌아들면 별빛 누리길 이정표를 만난다. 산자락을 벗어나 정각마을 천문과학관에 이르지만 과학관은 코로나19로 휴관 중이다. 곧 정각삼거리 버스정류장에 닿으며 산행을 마무리한다. 속살까지 드러낸 나목들이 우리네 사는 꼴처럼 앙상한 이즈음의 산은 오히려 편안하고 따뜻하다. 이 흉흉한 세월을 무어라 꼬집든 간에 산에서 마스크를 풀고 마음껏 숨을 쉰 하루였다.
산행길잡이
정각삼거리 버스정류장~절골~정각사~시루봉(1,123.9m)~보현산 정상~주차장~보현지맥 갈림길~가지재~작은 보현산 갈림길~갈미봉(786.5m)~별빛 누리길~보현산 천문과학관~정각삼거리 버스정류장 <5시간 30분 소요>
교통
영천 버스터미널(1666-0016) 앞 버스정류장에서 360, 360-1, 360-2, 361, 363, 450, 451, 450-1, 450-2번 시내버스를 타고 정각삼거리 버스정류장에 내린다. 운행 시간은 영천교통 홈페이지(ycbus.kr)를 참조한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내비게이션 목적지는 영천시 보현산 천문과학관으로 하면 된다.
숙식(지역번호 054)
영천역 인근에 하얏트모텔(335-7858), 세바모텔(333-5008), 쇼모텔(334-1000) 등 숙소가 많다. 영천역 인근의 영천공설시장에는 곰탕을 메뉴로 한 식당이 즐비하다. 구수한 곰탕과 소머리 수육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든든한 한 끼가 되어준다. 이뿐만 아니라 공설시장에는 다양한 음식들이 손님들의 입을 즐겁게 한다. ‘영천 별빛야시장’도 한 번 찾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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