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하며 화합, 외적은 즉각 응징" 창녕조씨 태호공파 [남도종가]

2021. 2. 23.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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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선생 日에 문명의 씨앗 뿌리러 떠난곳
600년 구림대동계, 미풍양속 공동체 주도
신라 핵심세력→고려 8대 연속 평장사 배출
신라보국대장군, 홍건적격퇴, 병자호란의병
두류산 양단수, 삼동에 베옷.. 조식 후학양성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내가 인내해서, 구림공동체 대동(大同)과 평화를…외적에겐 인내라곤 1도 없다.”

영암 구림마을은 왕인박사가 일본에 문물을 전해주기 위해 떠난 상대포가 있는 곳이다. 걸출한 국제 지도자의 고향 답게 마을에 평화가 넘친다. 상대포엔 매년 왕인 박사의 일본 후진들이 찾아 배례한다.

영암 창녕조씨 태호종가 입구 다리위에 새겨진 가훈 ‘아인(我忍)’ 표지석. [남도일보]
창녕조씨 태호종가 서호사
구림마을의 왕인박사 유적지에 곧 봄이 온다

창녕조(曺)씨 태호종가가 터 잡은 구림마을은 월출산과 서호 사이에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피폐해진 문화, 풍속, 생활의 지혜, 나눔의 마음을 600년간 일군 미풍양속 르네상스의 본향이다.

종가의 가훈은 ‘아인(我忍)’. 내가 참아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 그러나 외적의 침입에는 참지 않고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7세기 신라 김춘추,김유신 ‘양김’을 지도했던 보국대장군 조계룡이 창성(창녕)부원군으로서, 창녕조씨의 시조이다. 화왕산 용담에서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이 용의 정기로 잉태해 태어난 아기가 겨드랑이에 조(曺)자를 새긴 채 태어났다는 조계룡 탄생설화가 전해져 용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씨족의 상징성을 드러낸다. 창녕이 가야 지역이어서 가야왕족 출신으로 보인다.

그는 어릴적부터 궁궐에서 자라며 진평왕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역사적 사실로서 최종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조계룡이 선덕여왕의 남편 김인평(=음갈문왕=曺갈문왕:이두 표기의 한자식 재표기)과 동일 인물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창녕조씨 대종가는 여러 고증을 제시하며 조계룡이 진평왕의 사위임을 밝힌 바 있다. 그가 삼한 통합 장본인인 양김 모두를 지도한 것은 분명하다. 조계룡의 묘는 흥덕왕릉이 있는 경주 안강에 있다.

조계룡의 5대손 조겸이 창녕조씨 중시조이다. 조겸의 손자 조연우부터 15세 조자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중평장사를 역임했다. 고려에서도 명문세족이었던 것이다.

고려말 홍건적을 물리친 조민수(?~1390)는 문화시중에 오르고 창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조선 전기 대사성 조위(1453~1503)는 김종직과 함께 신진사류로서 조의제문 기록물을 편찬했다.

‘두류산(지리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수능시험 시조로 유명한 조식(1501~1572)은 지리산 천왕봉을 낀 산청에서 후학 양성에 힘써 정인홍, 곽재우 등을 길러냈다.

조선전기 부제학 조상치의 7세손 조기서(1556~1591)가 영암군 서호면 일대의 유력 가문인 선산임씨 임혼의 사위가 되었는데, 기축옥사 때 정여립 등 호남 유생들의 억울함을 상소했다가 간신의 질시가 있자, 벼슬을 버리고 처가가 있던 서호에 낙향했다. 이곳에서 임환(백호 임제의 동생) 등과 교유했다.

창녕조씨 태호종가와 마을 풍경
태호공 사적비

조기서의 둘째 아들인 조행립(1580~1663)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 임씨 등 가족들과 함께 외가인 구림촌에 피난해 정착하면서 태호공파 태호종가를 열었다. 하지만 정유재란에 형제를 잃었다. 서호 반남박씨로서 예조참의,나주목사 등을 지낸 박동열(1564~1622)에게서 수학했다.

조행립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으며 사헌부 감찰, 익산 군수 등을 거친 후 낙향, 구림대동계를 재조직해 잇따른 전쟁으로 위태로워진 인의예지,풍속 회복을 주도했다.

부친 조기서와 친했던 정여립이 국방 중심의 대동계를 창시했다면, 조행립은 국방을 포함한 사회,경제,문화를 포괄하는 성격을 띠었다. 재조직 이전 시기까지 포함하면 600년 전통이다.

문화재가 된 영암 구림 대동계 문서는 총 3종 81책으로 구성돼 계의 재건 때인 1609년부터 1743년까지의 규약과 활동이 잘 정리돼 있다. 태호공 조행립의 행적을 추모하기 위해 1677년 서호사(당시 이름은 태호사)가 건립됐다. ‘조종수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지방문화재가 된 종택은 온고지신 잘 보존돼 있다.

창녕조씨 태호공파 태호종가 보호수 소나무 [남도일보]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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