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가 물었다 "오히려 고양이가 나랑 놀아주는 게 아닐까?"

2021. 2. 23.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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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리스트] [8]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 동물과의 共生, 이 사상가를 보라 5

문화는 선별과 여과의 오랜 역사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리스트를 제출하느냐는 것. 서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의 ‘지하철에서 만나는 최고의 풍경 5’로 시작한 당신의 리스트 제8회에선 김홍중〈사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인간과 동물 간의 우정을 이야기합니다. 동물과의 공생(共生), 이 사상가를 보라 5. ㅡ편집자

재난은 우리를 사상가로 만든다. 우리에게 사유를 명령한다. 전대미문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미래로 가는 활로(活路)를 스스로 고뇌하여 열어야 한다. 수많은 난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중에서 나는 인간이 비인간 생명체와 맺어야 하는 새로운 관계를 고민해 보기를 제안한다. 인간이 야기한 지구 시스템의 변화에 의해 수많은 생명 종들이 멸종되고 있는 21세기. 과연 우리는 동물들과 어떻게 공생해 가야 하는가? 다섯 명의 걸출한 사상가들의 일화를 통해 이 문제를 고민해 보고자 한다.

이탈리아의 아시시(Assisi)에서 태어난 성 프란체스코(1182~1226)는 가난한 자들의 성자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방탕한 청춘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극적인 회심(回心)을 통해 변화하여 일생을 청빈과 경건에 바친다. 그는 동물들과 친교를 나눈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새들에게 설교하는 장면은 불멸의 에피소드로 남아 있다. 일화에 의하면, 그가 새들을 불러 축복하고 진리를 말하자, 새들도 날개를 펼쳐 화답하며 지저귀면서 함께 즐거워했다고 한다.

사실, 성서에 동물과 인간이 교감을 나누는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동물은 희생 제물이나 소유물, 혹은 비유의 대상으로만 나타난다. ‘창세기'의 뱀이 유일한 예외다. 음흉하고 사악하게 그려진 파충류와 하와의 소통은 그러나 낙원의 상실이라는 파국으로 귀결된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시초부터 갈등, 적대, 그리고 기만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에 있는 벽화‘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체스코’. 중세 말 피렌체 출신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1267~1337)의 작품으로 동물까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포용해 기독교의 가치인 사랑을 설파하는 성인의 모습을 그렸다. /위키피디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 프란체스코의 일화가 얼마나 독특하고 특이한 사건인지 깨달을 수 있다. 그는 아무런 조건 없이 동물을 귀하게 대우한다. 심지어 동물들과 진리를 함께 나눈다. 기독교가 발명한 사랑이라는 가치는 이제 인간의 세계를 넘어 동물의 삶으로까지 확장되어 간다. 영성의 혁명이다. 자발적 빈곤을 주장하는 그의 사상에는 공유(共有)를 강조하는 급진적 평등주의가 깔려 있다. 불평등에 대한 예리한 문제의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시시의 성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동물들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몸짓에는 생태 혁명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21세기 문명이 성 프란체스코를 명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난세 아닌 시절이 어디 있을까만, 몽테뉴(1533~1592)가 살았던 16세기 후반의 유럽도 전쟁과 역병이 휩쓰는 죽음의 시대로 기억된다. 판사직에서 물러나 영지의 성탑에 은둔하면서, 그는 20년간 ‘수상록'을 집필했다. 시시콜콜한 일상다반사에서 날카로운 진실의 파편들을 발굴했다. 말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반짝이는 질문을 저서에 끼워 넣었다. “내가 고양이와 놀아주고 있을 때, 실제로는 고양이가 나와 놀아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

몽테뉴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지금 초월적 신의 마음이 아니다. 그는 한가롭게 자신과 노닥거리는 조그만 동물 친구의 마음을 알고 싶어한다. 섬세하고 따뜻하다. 저 녀석의 눈동자 뒤에는 어떤 마음이 숨겨져 있을까? 몽테뉴는 질문의 주체와 객체를 바꾸어 보는 것이다. 고양이 너도 내 마음이 궁금하지 않니? 너도 지금, 네가 나와 놀아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니? 고양이와 몽테뉴는 슬그머니 평등해졌다. 몽테뉴도 주관이고, 고양이도 주체다.

17세기 초에 데카르트는 몽테뉴가 보여주었던 이 관대한 태도와 사뭇 결을 달리하는 철학적 원리를 선포한다. 그에 의하면, 세상의 참된 주체는 오직 ‘생각하는 나’밖에 없다. 이성도 영혼도 없다고 상정된 동물은 그저 복잡한 기계장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불길하고 협소한 이런 관점은 20세기 자연과학에 의해 대부분 오류로 판명되었다. 동물도 고통을 느끼고, 서로 소통하며, 감정을 갖는다. 도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동물 세계에도 도덕성이 존재한다. 다른 동물을 위해 희생하기도 하며, 어떤 동물은 애도할 줄도 안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차이보다 더 깊은 연속성이 존재한다. 알고 보면, 모든 생명체는 ‘생각하는 나’인 것이다. 궁금하다. 데카르트가 아니라 몽테뉴의 사상이 근대를 이끌었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1977년 8월 20일, 연극배우 추송웅(秋松雄)은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을 공연한다. 원숭이로 분장한 강렬한 표정. 휘둥그레진 눈동자. 불안해 보이는 몸짓.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리는 입.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 작품은 사실 1917년에 발표된 카프카(1883~1924)의 단편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각색한 것이다.

소설에서, 원숭이 피터는 고명한 학자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보고하고 있다. 원래 그는 아프리카 황금 해안에서 사냥꾼의 총에 맞아 상처를 입고 포획되었다. 유럽으로 이송되던 배에서 출구 없는 쇠창살에 갇힌다. 도망치는 대신 인간을 모방하여 인간 세계로 탈출하기를 꿈꾼다. 마침내 사람의 언어를 익히고 서커스단에 들어가 5년 동안의 빠른 진화를 거쳐 인간이 된다.

카프카는 언젠가, 우리 정신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와 같은 언어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빨간 피터의 고백이 그 도끼다. 피터는 문명과 야만의 구분, 인간과 동물의 구분, 자유와 탈출의 구분을 파괴한다. 그는 묻는다. 무엇이 과연 인간의 본질인가? 인간은 동물을 사냥하고, 포획하고, 지배할 권리를 갖고 있는가? 나(피터)는 인간인가 아니면 동물인가? 1977년의 추송웅이 불러낸 빨간 피터가 지금 다시 나타난다면 그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들뢰즈(1925~1995)의 철학에는 생명을 휘감고 소용돌이치는 역동적 힘에 대한 긍정이 있다. 그 힘의 이름이 욕망이다. 욕망의 끝없는 흐름을 끊고 또 이어가며 살아나가는 주체를 들뢰즈는 기계(machine)라 불렀다.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바이러스도 기계다. ‘천의 고원'을 비롯한 여러 텍스트에 등장하는 진드기라는 조그만 동물도 그런 생명 기계의 하나이다.

그에 의하면, 진드기의 일생은 세 가지 욕망으로만 구성된다. 첫째, ‘빛’이 비추어지면 진드기는 나무를 타고 그 꼭대기에 올라가 자리를 잡는다. 둘째, 포유동물의 ‘냄새’가 나면 다이빙하듯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셋째, 동물의 ‘털’을 헤쳐 피부를 뚫고 들어가 피를 빤다. 그리고 알을 낳고 죽는다. 빛, 냄새, 털로만 구성된 하나의 영토. 이것이 진드기가 살아가는 세계다. 빈곤하지만 견고하다. 들뢰즈는 생명을 이어가는 이 미물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세계는 인간에게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고투의 현장이다. “얼마나 대단한 역량인가!” 그는 진드기에게 경탄한다. 숲에, 강물에, 흙 속에 무수한 생명 기계들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음을 그는 가르쳐준다.

우리가 코로나19를 통해 배운 것이 바로 이 사실이 아니던가? 보이지 않는 작은 존재들이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그들이 인간과 얽혀 예기치 못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 푸코는 “언젠가 이 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라 불릴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생명에 대한 고민이 갈수록 깊어가는 이 시대에 푸코의 저 찬사는 과히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암(癌) 연구를 위해 유전적 변형을 가한 쥐들이 있다. 온코마우스(oncomouse)라 부른다. 인간 종양 유전자를 이식하여 암에 쉽게 걸리도록 조작을 한 것이다. 1988년에 온코마우스는 살아 있는 생명체로는 처음으로 특허를 획득한다. 생명공학의 발명품이자 인간-쥐 잡종인 이들은 주로 유방암 연구에 투입되어, 온갖 실험을 겪다가 폐기된다.

우리 시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 중 한 사람인 해러웨이(77)는 이 쥐들을 언니 혹은 여동생이라 부른다. 시스터(sister)! 쥐들은 인간 대신 암에 걸려 종양을 달고 괴로워하다가 실험실에서 죽어간다. 이들은 희생양이다. 쥐의 죽음과 여성의 생명 사이에는 종(種)을 넘어서는 친족적 연결이 존재하는 것이다. 유전공학의 시대, 기독교의 구원사(救援史)가 생쥐들의 희생 속에서 매일 반복되고 있다고 해러웨이는 말한다. 실험동물의 죽음에서 예수의 수난을 읽어 낸다. 저 생쥐의 까만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라.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많은 동물들의 죽음에 빚지고 있는지를.

아버지가 장애인이었던 해러웨이는 건강한 유럽의 백인 남성을 모델로 하는 근대적 ‘인간’의 외부를 응시했다. 그 바깥에 웅성거리는 존재들(유색인 여성, 반려동물, 실험동물, 장애인)의 힘을 꿰뚫어 보았다. 그 가능성과 연대함으로써 해러웨이는 언제나 한발 앞서 시대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혜안을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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