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다섯 살의 언어 세계

이지수 2021. 2. 23.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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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있어 좋은 점 중 하나는 인간이 어떻게 언어를 배워나가는지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몸도 급속하게 자라지만 어휘력이 자라는 속도는 그보다 더 빨라서 일주일 전과 지금이 다를 정도다. “마아(엄마)” “시여(싫어)”와 같은 마디 하나에서 출발한 다섯 살 아들 유하의 언어 세계도 점점 가지를 뻗어 어느새 제법 무성한 나무의 형태를 갖추었다.

자식이 있어 좋은 점 중 하나는 인간이 어떻게 언어를 배워나가는지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몸도 급속하게 자라지만 어휘력이 자라는 속도는 그보다 더 빨라서 일주일 전과 지금이 다를 정도다.

가령 ‘오랜만에’라는 새로운 단어를 들으면 유하는 우선 그것을 아무 말에나 붙여본다. “나 오랜만에 쉬야 해.”(몇 시간 전에도 했음) “아빠랑 오랜만에 노네?”(몇 분 전에도 놀았음) “오랜만에 ‘헬로 카봇’이나 볼까?”(전날도 봤음)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유하는 드디어 맞춤한 문장을 찾아낸다. “오랜만에 준영이 집에 놀러 가자!”

이럴 때 남편과 나는 최대치의 환호로 아이의 성공을 축하해준다. “우와, 유하가 ‘오랜만에’라는 단어를 쓸 줄 알게 됐네!” 유하는 씩 웃으며 제 작은 성취를 만끽한다. 이런 식으로 획득한 자신의 언어로 유하는 날마다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낸다. 잘못해서 혼내면 애절한 표정으로 “상냥하게 말해주세요. 단호한 건 싫어요.” 어린이집 현관에서 신발을 벗지 않으려 해 채근하면 “엄마랑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런 거야.” 한번은 남편이 “회사 동료에게 말실수를 한 것 같아” 했더니 “푹 자고 일어나서 웃는 얼굴로 ‘미안해’ 하면 돼”라고 충고해 큰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검정 마스크를 쓰고 산책하는 이웃을 가리키며 “이상한 사람이 있어요!” 할 때면 좀 난감하지만 유하의 언어는 대체로 순하고 맑다. 일 때문에 자정이 넘어 집으로 돌아온 날 아침, 내 목을 끌어안으며 “엄마가 사라질까 봐 꼭 껴안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 유하의 언어 세계에서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머무르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일 뿐, 유하는 거친 말, 차가운 말, 아프거나 슬픈 말도 나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배워갈 것이다. 그때가 오면 새로운 단어를 사용했다고 환호할 일도 없겠지만, 유하가 온갖 단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나와 대등하게 대화할 미래도 기대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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