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이 남자냐 여자냐 그것이 무슨 문제더냐
국립극단이 25~27일 공연하는 온라인 연극 ‘햄릿’은 주인공 햄릿이 여성이다. 오필리어는 남성으로 바꿨다. 여배우 김성녀는 26일부터 연극 ‘파우스트 엔딩’에서 파우스트 박사로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른다. 연극 ‘아마데우스’는 살리에리를 어느 날에는 남성이, 어느 날엔 여성이 연기한다. 성별 고정관념을 깨는 ‘젠더 프리(gender-free)’ 캐스팅이다.
“셰익스피어가 만든 인물 중 16%만 여성이고, 기억에 남는 대사 대부분은 남성이 던진다. 이 심각한 불균형을 바로잡고 싶다.”
셰익스피어의 심장이라 불리는 영국 글로브 극장에서 예술감독을 지낸 엠마 라이스가 한 말이다. 극작가 겸 연출가 김명화씨는 “국내 공연계에서도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이후 여성들의 분노와 연대감이 ‘배역에서의 성평등’이라는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며 “고정된 성별에서 벗어나는 긍정적인 지점도 있지만 유행을 넘어 미학적이면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문제작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바꿔라, 남성을 여성으로
요즘 대세가 된 주문(呪文)이다. 과거엔 여장남자(‘왕의 남자’에서 이준기)나 남장여자(‘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윤은혜) 설정을 넣었을 뿐, 적극적인 ‘성전환’은 없었다. 이젠 남성 배역을 여성이 가져간다. 햄릿의 유명한 독백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나 파우스트 박사의 탄식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되었구나”를 여성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셈이다.
국립극단 ‘햄릿’에서 여배우 이봉련이 연기할 햄릿 공주는 왕위 계승자이자 칼싸움에 능한 해군 장교 출신이다. 각색을 한 정진새 작가는 “착한 여자는 천당에 가지만 악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며 “시대를 견뎌내는 사회적 약자들이 리벤지(R)석이나 사일런트(S)석에서, 혹은 어딘가에서 저마다의 ‘극중극’이나 ‘꿈속의 꿈’을 완성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새롬 연출가는 “햄릿이 여성이어도 왕권을 갖고 싶고 복수하고 싶고 남성처럼 고민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문제는 완성도와 상업성
‘파우스트 엔딩’을 연출하는 조광화씨는 “늙은 남자 파우스트가 젊은 여자 그레첸을 망가뜨리는 원작이 불편했다”며 “파우스트를 여성으로 바꾸니 인간 대 인간으로 더 순수한 교감이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민감한 장면을 우회하며 재해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연칼럼니스트 이수진씨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그 원작이 불편하다면 배역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꾼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젠더 프리의 더 큰 문제는 관객의 핵심인 여성을 겨냥한 상업성이다. 이수진씨는 “눈길을 끌고 돈이 되니까 하는 ‘젠더 프리’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떤 작품은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여혐(女嫌)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형태는 다르지만 여풍(女風)은 드라마에도 분다. 최고 시청률 17.4%를 기록한 ‘철인왕후’는 조선시대 중전의 몸에 현대 허세남의 영혼이 깃들어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요리하는 남자, 사냥하는 여자 등 기존 사극에 없던 역할 바꾸기로 인기를 모았다.
◇길 잃은 ‘이상한 성평등’?
동양 전통극 역사에는 여성이 남성을 연기하는 사례가 있었다. 우리 여성국극이나 일본 가극단 다카라즈카(寶塚)가 대표적이다. 반대로 중국 경극이나 일본 가부키에는 여성 배역만 전문적으로 맡는 남성 배우도 있다.
김명화씨는 “여성이 남성을 연기할 때 더 이상적인 남성의 모습을 그릴 수 있고 여성 관객에게 쾌감을 준다는 점은 이해한다”면서도 “여성이 더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공연을 만들고 싶지, 단순히 남성 배역을 여성으로 바꾸는 것으론 성에 차질 않는다”고 말했다. 젠더 프리의 본래 취지는 ‘여성에게 더 많은 역할과 목소리를 주자’였다. 이수진씨는 “알맹이 없는 ‘이상한 성평등’은 일시적 유행에 그치거나 반작용을 부를 수 있다”고 했다.
여성이 로미오, 남성이 줄리엣을 연기하는 ‘로미오와 줄리엣’도 나올지 모른다. 이 논란의 종결자는 완성도다. 성별을 파괴한 ‘햄릿’과 ‘파우스트’는 지금 아슬아슬한 시험대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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