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스포츠계 '제 식구 감싸기'

최희진 스포츠부 2021. 2. 2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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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 이재영·다영 자매에게서 시작된 학교폭력 폭로 사태가 남자프로배구와 프로야구 등 전방위로 번지고 있다. 가해 사실을 인정한 선수들은 구단의 출전 정지 징계를 받거나 스스로 출전을 포기했다. 이 와중에 ‘유탄’을 맞은 사람이 있다. 2009년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내에서 벌어졌던 구타 사건이 재조명되면서 당시 대표팀 코치이자 가해자였던 이상열 KB손해보험 배구단 감독이 도마에 올랐다. 인터뷰 도중 이재영·다영 자매 사태에 대한 질문을 받은 이 감독은 “인과응보가 있더라” “잘못하면 대가를 치른다” 등 자신의 과거사를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최희진 스포츠부

이 인터뷰는 당시 피해자였던 남자배구 간판스타 박철우(한국전력)의 상처를 헤집어 놓았다. 박철우가 보기에 이 감독은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당시 박철우의 폭로 기자회견 이후 대한배구협회에서 무기한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던 이 감독은 2012년 경기대 배구부 감독이 됐고, 지난해엔 KB손해보험 감독이 됐다.

프로배구에는 기자들이 승리 팀의 수훈선수를 인터뷰하는 관행이 있다. 할 말이 많았던 박철우는 팀을 승리로 이끈 뒤 당당히 인터뷰실에 들어왔다. 그는 “이 감독님이 경기대 시절에도 선수들에게 ‘박철우 아니었으면 넌 맞았다’는 말을 했다더라. (선수를 때리는) 문화가 당연하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소나기는 피하자는 계산이었을까. 이 감독은 ‘시즌 잔여 경기 출장 포기’라는 기상천외한 대응책을 내놨다. 감독이 사퇴하는 경우는 있어도 출장을 포기하고 몸을 숨기는 전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박철우는 당분간 이 감독과 마주치는 불편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겠지만, 이 감독은 다음 시즌 리그로 돌아온다.

프로 리그를 관장하는 한국배구연맹은 선수들의 학교폭력이 프로 입단 전의 일이기 때문에 징계할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납득할 만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감독은 박철우를 피멍이 들도록 구타한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진 사람이었다. 가해자가 프로팀 감독으로 금의환향하는 것을 배구연맹이 수수방관한 게 옳았는지는 따져 볼 일이다. 박철우는 이 감독을 한 공간에서 마주치는 게 고통스럽다고 했다. 배구연맹이 이 2차 가해의 공범은 아니었을까. 폭행 가해자를 감독으로 ‘모신’ 구단도 마찬가지다.

학교폭력 논란이 이 감독의 출장 포기 사태로 확산된 책임의 일부도 당시 이 감독을 일벌백계하지 않았던 배구협회와, 그를 경기감독관으로 선임하며 면죄부를 준 배구연맹에 있다. 이 감독이 명목상으로나마 죗값을 충분히 치렀다면 박철우가 이 감독의 “인과응보” 발언에 울분을 터트리는 일이 일어났을까.

어린 시절부터 합숙 훈련을 하면서 병영 문화를 체득한 엘리트 배구인들은 폭력을 일상다반사로 여기면서 성인이 됐다. 이번 사태가 보여주듯, 그런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해 폭력을 일삼고 또 가해자를 벌하지 않는다면 리그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더 많은 피해자가 나타나고, 더 많은 선수가 팀을 떠나야 할 것이다. 제 식구 감싸기는 지금까지 충분히 했다.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다.

최희진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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