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대응 치중, 응급환자 아들 희생에.."공공의료 한 걸음 더" 아버지의 도보행진
경산~청와대 앞 행진 시작
[경향신문]
“아들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 걸음이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해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코로나19 1차 유행 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숨진 고교생 정유엽군(당시 17세)의 아버지 정성재씨(54)가 22일 공공의료체계 강화 등을 요구하며 청와대까지의 도보행진을 시작했다.
이날 오전 정씨는 ‘정유엽사망대책위원회’ 관계자 등 150여명과 함께 경북 경산중앙병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도보행진에 나섰다. 정씨는 “아들이 살아 있었다면 자신의 이름이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고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사회의 불합리한 부분을 개선할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지도록, 또 자신과 같은 부당한 죽음이 없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번 도보행진을 통해 아들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도록 공공의료 시스템 개선 등 희망의 메시지로 승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정유엽군은 지난해 3월18일 대구 영남대병원에서 급성 폐렴으로 숨졌다. 정군은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 증세를 보여 코로나19 감염이 의심되면서 민간병원에서의 입원과 치료가 늦어졌다. 결국 정군은 코로나19 검사만 13번 받다가 숨을 거뒀다. 이후 의료계에서는 코로나19에 대응하느라 정군과 같은 응급환자가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사망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씨와 대책위는 정군의 사망 사례가 한국의 응급의료체계가 부실하고 의료를 방역으로 접근하는 현실, 사회가 공적으로 의료를 책임지는 게 아니라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현실을 보여준다고 했다. 따라서 이번 도보행진과 함께 청와대 국민청원도 진행한다. 취약계층 의료공백 및 의료불평등 사례를 확인하고 해결 방안을 논의해보자는 취지다.
대책위는 한국의 전체 병상 중 공공병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1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70%)의 7분의 1 수준이라고 밝혔다. 대책위 관계자는 “고열 환자 누구나 진료를 거부당할 수 있으며, 우리 사회 구성원 누구나 의료공백의 아픔을 당할 수 있다”면서 “특히 장애인과 이주민 등 취약계층의 의료 공백 및 의료불평등 현실은 더욱 심각하다”고 말했다.
정씨와 대책위는 정군 사망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정부·시민·전문가가 참여하는 코로나19 의료공백 전반에 대한 사회적 조사, 응급의료 시스템 및 의료를 방역으로만 보는 감염병 대응지침 개선 등 의료공백 재발방지 대책 마련, 또 모두가 안심하는 공공병원 확충과 취약계층 의료평등권 확보 등 의료공공성 강화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를 알리기 위해 시작한 도보행진의 주제는 ‘정유엽과 내딛는 공공의료 한 걸음 더’이다. 정씨는 경산에서 출발해 청와대까지 약 380㎞를 걸을 예정이다.
정씨는 도보행진 기간 동안 이틀간 휴식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평균 18㎞를 걷기로 했다. 직장암 3기인 정씨는 1년여 전 항암치료를 받은 이후로 손발저림 등 후유증을 앓고 있다. 이런 상황 등을 감안해 일부 대책위 관계자들이 정씨와 함께 발걸음을 맞춘다.
정씨와 대책위는 다음달 17일 오전 10시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도보행진을 마무리하게 된다. 또 행진 종료 다음날에는 경산에서 정군 사망 1주기 추모제를 연다.
글·사진 백경열 기자 merc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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