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슬픔마저 숨겨야 하나요? / 정민석

한겨레 2021. 2. 2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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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18회 퀴어문화축제의 ‘한국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 부스. 레인보우커넥션프로젝트 연구팀이 찾아온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김승섭 제공

정민석 ㅣ인권재단 사람 사무처장

갑작스러운 부고에 울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트랜스젠더로서 자신의 삶을 모티브로 쓴 연극이 상을 수상할 만큼 극작가로서 앞으로의 삶이 기대되었는데, 그는 미래가 아닌 현재의 막막함 때문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의 가족이 어디서 왔냐고 물어봤다. 순간 쭈뼛거리며 그냥 “모임에서 왔어요”라고 답했다.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었나?’ ‘괜히 나 때문에 알게 되는 건 아닐까’ 불현듯 떠오른 생각 때문에 선뜻 내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 말하지 못했다. 10년 넘게 알고 지냈지만 추모의 시간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름도 말하지 못하고, 사인도 물어보지 못한 채, 용기 내지 못하고 숨 막히는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그리고 바깥에서 서성이고 있던 성소수자 조문객들의 어두운 표정을 마주했다.

다큐멘터리 <퀴어의 방>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영화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전 성별정정을 안 했고 민증은 그대로니까. 지레 찔리는 것 있잖아요. 여태까지 살았던 집이 제 명의였던 적이 한번도 없어요.” 커밍아웃 이후 부모의 ‘나가서 죽어버리겠다’는 협박을 뒤로하고 집을 나와야 했던 그가 얼마나 고단하게 삶을 이어왔는지 엿볼 수 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사람들의 집요한 물음 앞에 지레 찔려 집 계약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 트랜스젠더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차별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 2월9일 국가인권위는 국가기관 최초로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만 19살 이상 트랜스젠더 591명이 참여한 대규모 연구다. 이 조사에는 ‘참거나’ ‘포기하거나’ ‘거부당했다’는 경험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응답자의 39.2%는 화장실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바깥에서 음료를 마시지 않고,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21.5%는 의료기관 이용을, 57.1%는 자신의 성별정체성 때문에 구직을 포기했다. 19.5%는 202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분증 확인으로 자신의 지정성별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투표권을 포기해야 했다. 응답자의 65.3%는 지난 1년 동안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하였다. 화장실 가는 것도, 병원을 이용하는 것도, 관공서나 은행에 가는 것도, 직장을 구하는 것도, 집을 계약하는 것도, 심지어 투표를 하는 것도 포기해야 하는 트랜스젠더들은 존재를 거부당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 모두가 누리는 일상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우는 현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에스비에스(SBS)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동성 간 키스 신을 ‘가족과 시청해야 하는데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는 이유로 삭제했다. 안철수 서울시장 후보는 20년 넘게 개최되고 있는 퀴어문화축제를 향해 거부할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서울시교육청 제2기 학생인권종합계획에 포함되어 있는 성소수자 학생을 보호하고 지원한다는 문구를 두고 학교에서 동성애 의무화 교육을 강요한다며 삭제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정말 혐오발언의 빗장이 열리자, 그 칼끝이 매일같이 몸에 와닿는 것만 같다. 불편함 때문에 삭제되고, 거부도 권리라고 말하고, 성소수자 학생 보호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현실이 갑갑하기만 하다.

차별은 지우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 했던가. 20년 전 제정된 국가인권위원회법 차별금지사유에 ‘성별정체성’이 포함되지 못했지만 트랜스젠더들이 경험하고 있는 차별이 사회적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국회에 계류 중인 차별금지법 차별금지사유에는 ‘성별정체성’이 포함되어 있다. 잘 모른다고, 익숙하지 않다고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 직면할 때 차별은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쓴 연극에서 “나는 살아남고 싶었고, 그래서 평생 모든 것을 회피하며 살았으니, 죽음 앞에서는 당당하길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고 싶어 했던 그의 바람이 전달되는 것만 같다.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성소수자 동료들은 주위의 소중한 친구들이 자꾸 사라지게 되자 죽음이 슬픈 것보다 익숙해질까 봐 무섭다고 말한다. 누군가 경험하고 있을 일상 속 차별들을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삶을 향한 간절한 호소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차별의 발견은 삶을 지속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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