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기'의 변주 / 안영춘

안영춘 2021. 2. 22.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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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경구는 쓰임새를 짚어볼 대목이 적지 않다.

우선 개의 비유가 걸린다.

경구가 만들어질 무렵에는 동물권은커녕 인권의 개념도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속담 속의 개는 '직업에 귀천 없다'는 평등주의와 한 자락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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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경구는 쓰임새를 짚어볼 대목이 적지 않다. 우선 개의 비유가 걸린다. 그래도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낙후했다고 하는 건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경구가 만들어질 무렵에는 동물권은커녕 인권의 개념도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속담 속의 개는 ‘직업에 귀천 없다’는 평등주의와 한 자락 닿아 있다. 다만 평등은 버는 단계가 아니라 쓰는 단계에 달성된다. 프랑스 종교개혁가 장 칼뱅(1509~1564)의 ‘소명으로서의 직업’ 교리와도 연결해 볼 만하다. 직업은 신에 의해 주어진 거여서, 그게 뭐든 죽어라 하고 돈을 버는 게 옳다. 그럼에도 쓰는 단계에서는 철저히 금욕적이어야 한다. 정승은 곧 금욕주의자여야 한다.

우리 속담과 견줄 만한 서구 규범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일 듯하다. 그러나 규범의 적용 대상이 애초 세습 유한 귀족이어서인지, 돈 버는 과정(‘개의 시간’)에 대한 언급은 건너뛴다. 귀족의 위상이 고가구와 다를 바 없게 된 지금,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주인공은 단연 자수성가형 억만장자들이다. 그들의 오블리주는 쩨쩨한 금욕주의가 아니다. 통 큰 기부다.

근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대표하는 자수성가형 억만장자로 앤드루 카네기를 들 수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 가난한 이민자에서 철강왕에 오른 뒤, 재산의 4분의 3을 기부해 사회적 약자를 보듬고 문화예술 진흥에 이바지했다는 위인전 속 인물. 그러나 위인전에 ‘홈스테드 학살 사건’(1892년)은 등장하지 않는다. 카네기는 파업 노동자 10명이 죽고 수백명이 다친 이 유혈극을 배후에서 방조했다. 카네기의 ‘개의 시간’은 탐욕 자체였다.

‘배달의민족’ 창업자 김봉진 의장이 자산 1조원 이상이 돼야 들 수 있는 세계적 기부클럽 ‘더기빙플레지’에 재산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했다. 그는 이제 빌 게이츠, 워런 버핏 급 ‘정승’이다. 앞서 김범수 카카오 의장도 재산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 반가운 흐름이다.

국내 자수성가형 신흥 갑부들의 ‘정승의 시간’은 단연 우아해 보인다. 배달의민족 운영사 이름이 ‘우아한형제들’인 건 이 세대가 자기 삶에 대한 심미적 주체임을 암시한다. 다만 그 우아함과 연결된 ‘배민’ 라이더들은 지금도 생사를 걸고 ‘개의 시간’을 질주하고 있다.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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