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위대한 농구인 서장훈

허진석 2021. 2. 22.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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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훈 씨와 아주 가끔 통화한다. 농구를 비롯한 스포츠 행사에 참석했다가 마주치기도 한다. 그는 언제나 태도가 깍듯하고, 차림이 단정하다. (그는 정말로 단정한 사람이다) 그와 통화하거나 만나서 대화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 기분을 느끼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리라. 그래서 서장훈 씨는 오늘날 인기 있는 방송인이 되었다.

서장훈 씨가 ‘공룡’이라는 별명을 달고 예능프로그램에 등장했을 때, 나는 무척 실망했다. 솔직히 말하면 덩치 큰 전직 프로농구 선수로서 눈요기 감이 되거나 이리저리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버림받을까 걱정을 했다. 서장훈 씨는 머리가 좋고 경우에 밝다. 아무리 그래도 소위 ‘예능판’이라는 곳은 사람을 어떻게 만들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가 2017년 9월 25일 종편 채널A에서 방영하는 인문학 예능 프로그램 ‘거인의 어깨’ 진행자로 출연하기로 결정됐을 때에야 적이 안심을 했다. ‘거인의 어깨’는 서장훈 씨의 스무 번째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서 출연진과 여러 가지 사회 이슈를 놓고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의견을 나누었다. 뛰어난 진행자였다.

서장훈 씨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날은 지난 2월 1일이다. 통화 중에 전화가 한 번 끊어져서 두 번 벨이 울렸다. 모두 합쳐 14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기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와 나눈 대화가 ‘취재’나 ‘인터뷰’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늘 어딘가에 무엇인가를 쓰는 사람임을 안다. 그러니 대화 내용을 조금 소개해도 나를 크게 비난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더 맑고 단정한 목소리로 변함없이 잘 정리된 생각을 나에게 전달했다. 대부분 안부를 묻고 격려하는 대화였다. 나는 그가 출연하는 방송을 잘 보고 있다고 했다. 말끝에 “이제 코트에서는 영영 볼 수 없나 싶다.”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서장훈 씨는 이 말이 걸렸던지 나를 달랬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농구코트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나는 비슷한 말을 전에도 들었다. 아니, 읽었다. 종합경제지 ‘아시아경제’의 2017년 9월 27일자 27면에 실린 서장훈 씨의 인터뷰 기사. 한 면을 거의 다 채운 기사의 제목은 ‘보이는 모습보다 더 큰 거인 서장훈’이었다. 참으로 적절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아직도 서장훈 씨의 진면목을 모두 알지 못한다. 그의 팬들 가운데도 나와 같은 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농구코트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말은 반가웠다. 그러나 서장훈 씨는 아주 신중했다. 그를 코트로 부르려는 팀은 ‘어느 정도’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당장 성공을 거둘 가능성보다 실패할 확률이 낮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방송과 관련한 대화를 하다가 받은 인상 때문이다. 서장훈 씨는 자신의 한계(그런 것이 정말 있는지 모르지만)를 의식했다.

“제가 다시 농구를 하게 된다면 방송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농구를 하면서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또 농구를 하다가 실패하더라도 방송을 다시 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건 농구에 대해서도 방송에 대해서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서장훈 씨가 그런 모습을 ‘추한 꼴’로 인식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가 정말 농구를 한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서장훈 씨가 농구코트에 선 모습을 보려면 그가 정한 목표에 도전해 볼 만한 조건을 갖춘 팀의 부름이 있어야 한다. 농구를 시작한다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의 성격에 비춰볼 때 한 번 해보고 아니면 마는 식의 결정은 불가능하다. 방송, 특히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결심했을 때도 그는 모든 것을 거는 심정으로 얼굴에 분장을 했다.

“어느 프로그램이 가장 재미있던가?”
“XXXXXXXX입니다.”
“어떤 점이 가장 재미있던가?”
“제가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서장훈 씨는 머리 좋은 사람이 대개 그렇듯 비유에 능하다. 방송 일을 시작할 때 여러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농구를 했던 내가 고기 집을 열었다고 하루아침에 정육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농구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좋아한 운동이다. 농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여전히 크다.”

나는 서장훈 씨에게 스포츠 스타의 예능프로그램 진출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잘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한다.”는 희망과 전제를 달았다. 스포츠 스타의 장점은 좋은 상품이 된다. 하지만 품격을 떨어뜨리거나 일반인이 하기 어려운 기묘한 행동이나 역할로 재밋거리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한동안 셰프님들의 방송 출연이 잦았습니다. 최근 ‘먹방’이 유행하는데도 방송에 자주 출연하던 셰프님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몇 분만 남았습니다. 방송을 시작하는 스포츠 스타들이 잘 살펴야 할 부분입니다. 방송을 하다 실패하거나 흥미를 못 느낀 셰프님들은 주방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방송에서 실패한 스포츠 스타들이 돌아갈 곳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서장훈 씨가 방송인으로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어울리지 않는 곳에 가 있는 것만 같다. (꼰대) 그래서 그가 농구를 다시 한다면 말뜻 그대로 ‘컴백’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은퇴를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됐을 때 훌륭한 코치가 되어 좋은 선수를 많이 길러내는 미래를 상상했던 것이다. 그는 말을 골라서 사용했고, 말하는 방법도 남달랐으며 소신이 뚜렷했다.

그의 기량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나는 잠시 상상했다. ‘한국의 슈퍼스타들이 전성기의 기량으로 일대일 대결을 했을 때 서장훈을 이길 선수가 있을까?’ 나는 ‘서장훈이 역대 최강’이라고 생각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현명하게도) 무모한 기사는 쓰지 않았다. 나와 생각이 다른 농구팬들이 용서하지 않았으리라. 우선 허재 선수의 팬들이 나를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기사는 내 스포츠 기자 경력에 ‘역대급’의 흑역사로 남았을 것이고.

‘서장훈이 최고’라는 나의 생각은 기록으로 정당함을 주장할 수 있다. 정규리그 통산 최다득점(1만3231점), 최다 리바운드(5235개), 최다 자유투 성공(2223개) 기록은 모두 서장훈 씨가 갖고 있다.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는 두 번(2000, 2006), 챔피언결정전 MVP는 2000년, 올스타전 MVP는 2006년에 거머쥐었다. 농구대잔치 MVP는 세 번(1994, 1997, 1998) 했다.

SK를 1999~2000시즌 정규리그 2위, 챔피언결정전 우승으로 이끌었다. 농구팬들의 뇌리에는 3점슛에 능한 장신 포워드로 남아 있겠지만 이 당시에는 정통 센터였다. 마흔다섯 경기에 나가 평균 24.2득점 10리바운드로 시즌 더블-더블을 기록했다. 늘 맨 앞에 선 장수였다. 챔피언결정전 파트너인 현대의 로렌조 홀과 골밑에서 가슴과 가슴을 쿵쿵 부딪치며 대결했고, 이 싸움에서 이겼다. 그의 승리는 곧 소속팀의 승리로 이어졌다.

국가대표로는 1994~2006년 12년 간 활약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을 이기고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이후 20년 만에 금메달을 따는 데 기여했다. 이 무렵 나는 독일의 분데스리가 클럽 바이엘04 자이언츠에서 연수를 하고 있었다. 우리 팀의 우승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그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사진으로 본 우리 선수들은, 특히 서장훈 센터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조금 과장하면, 나는 서장훈 씨의 농구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했다. 나는 그가 휘문중학교 학생일 때 처음 보았다. 휘문고등학교와 연세대를 거치며 착실히 성장한 그의 잠재력은 (내가 보기에) 1995년 새너제이대학교에 가서 미국농구를 체험한 뒤 폭발했다. 1996년 3월 2일 최희암 감독과 함께 귀국해 연세대로 돌아온 그를 막을 상대가 국내 무대에는 없었다. (당시 그의 유학을 진로 문제와 연결 짓는 시각도 있지만 지금 내가 쓰는 글과 논점이 다르다.)

가슴 아픈 장면도 떠오른다. 1995년 2월 13일 농구대잔치 경기 도중 목을 크게 다쳐 쓰러지던 모습이 기억 속에 선명하다. 서장훈 씨는 그 부상 때문에 은퇴할 때까지 목에 보호대를 매단 채 경기했다. 그리고 그가 감당해야 했던 몇몇 지도자들의 심한 체벌. 그는 정말 많이 맞았다. 심지어 국가대표가 되어서도 맞았다. 그가 맞는 모습을 기자들(언젠가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과 학부형들, 특히 서장훈 씨의 아버지 어머니도 지켜보았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지만, 돌이켜보면 참담하다.

나는 여러 번 감독, 코치들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때립니까?” 농구 시즌이 끝나고 여름종목인 프로축구를 취재할 때도 물었다. “왜 그렇게 때리세요?” 청소년 대표 팀을 이끌고 신화적인 성적을 남긴 그 감독은 씩 웃으며 말했다. “한바탕 두들겨 놓으면 확 달라져. 이따 후반전에 봐. 번쩍번쩍 날아다닐 테니.” ‘궁금하면 맞아보라.’며 절반은 농담, 절반은 협박을 한 지도자도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들 사랑이 극진했던 서장훈 씨의 아버지도 체벌 장면을 담담히 지켜보았다.

여러 세월이 지났다. 서장훈 씨가 ‘미투’를 한다면 무사하지 못할 지도자가 숱하다. 그러나 그는 농구를 떠난 다음 지나온 세월에 대해 말하기를 즐기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지나온 세월을 선수 시절에 사용한 숙소처럼 말끔하게 정리해 두었을 것이다. 서장훈 씨가 정말 농구코트로 돌아온다면, 그 모습 또한 남다를 것이다. 나는 그가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농구를 가르치는 상상을 여러 번 했다. 그의 선수들은 맞지 않고도 최고가 되리라.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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