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지 못한 사랑처럼..서로를 향하는 튤립

전지현 2021. 2. 2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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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메이플소프 국내 첫 개인전
43세에 요절한 천재 사진 작가
사진 이미지 너머 상상력 자극
"나는 포르노그래피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예술·외설 넘나든 시대 아이콘
`Two Tulips` [사진 제공 = 국제갤러리]
사진 속에서 마주보는 두 튤립이 서로를 갈망하는 것 같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다른 하나는 아래에서 위로 최대한 줄기를 휘었지만 두 꽃은 닿지 않는다. 마치 사랑하지만 만날 수 없는 연인 같다.

43세에 요절한 미국 천재 사진 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1946~1989)의 1984년 정물 사진 'Two Tulips(투 튤립스)'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눈에 보이는 꽃에 머물지 않고 사진 너머 세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오른팔을 뻗은 그의 상체 절반만 포착한 사진도 마찬가지다. '뭘 하다가 저 사진을 찍었을까' '누구랑 같이 있었을까' 등 온갖 궁금증을 유발한다. 프랑스 작가 롤랑 바르트는 이 사진을 보고 "관객을 사진 밖으로 데려가 상상하게 하고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다"며 "보이는 이미지 이상의 욕망과 착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에로티시즘의 극치"라고 평했다.

서울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국내 첫 개인전 'More Life(모어 라이프)'에는 탐미적인 꽃 정물과 에로틱한 누드 사진만 있는 게 아니다. 표현 수위가 극단적이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수박에 칼을 꽂은 사진은 아찔한 긴장감과 두려움을 불어넣는다. 생전의 메이플소프는 "아름다움과 악마성은 같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이다.

양면성이 그의 작품을 읽는 열쇠다. 직선으로 뻗은 꽃이 남성 신체의 일부를 은유하며, 활짝 핀 난초 꽃으로 여성의 몸 일부를 연상하게 만든다.

전시를 기획한 이용우 서강대 교수는 "메이플소프는 성스러움과 세속스러움,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넘나들며 끊임없는 논란을 일으켰다"며 "20세기 후반 전 세계 비평가와 예술가들에게 가장 호평받은 사진작가이자 사회적 논쟁과 예술 검열 담론을 생산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고 설명했다.

켄 무디와 로버트 셔먼.
메이플소프의 카메라는 당대 금기시되던 흑인 남성 누드와 동성애, 사도마조히즘(가학적이고 피학적인 성취향)에 천착해 찬사와 혹평을 동시에 들었다. 하지만 메이플소프는 "나는 포르노그래피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19세 미만 관람 불가'는 아니지만 적나라한 사진들이 2층 전시장에 있다. 비밀스러운 사도마조히즘 의식, 굵은 쇠사슬에 거꾸로 매달린 남자 등 'X 포트폴리오' 연작이 펼쳐진다.

이 교수는 "외설보다는 사진 미학에 주목해 달라"며 "굉장히 치밀하게 계산된 채광과 완벽한 구도 등으로 극한의 사진 미학이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했다.

Watermelon with Knife.
전시장 1층에서 흑인 남자 켄 무디와 백인 남자 로버트 셔먼이 뒤통수를 맞대고 있는 사진은 인종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색감과 질감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도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 빈민가 출신 무디가 백인인 척 하는 것을 보고 메이플소프는 "넌 겉은 까만데 속은 하얀 오레오 과자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피사체의 본질을 꿰뚫어 당대 스타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전설적 펑크록 가수이자 그의 뮤즈였던 패티 스미스, 배우 리처드 기어의 매력을 담은 사진들이 1층 전시장에 걸려 있다.

Orchid. [사진 제공 = 국제갤러리]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부친을 위해 스미스와 위장결혼까지 했지만 메이플소프는 동성애자였다. 에이즈 합병증으로 43세에 작품 2000여 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1988년 그가 작은 해골로 장식한 지팡이를 들고 있는 사진은 죽음을 예견하고 찍은 영정 사진으로 다가온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뉴욕 휘트니 미술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파리 그랑 팔레,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LACMA) 등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어 작품세계를 조명하고 있다.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는 메이플소프가 후기에 천착했던 꽃 사진을 아우르는 작업들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는 3월 28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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