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논단] 절제의 규범과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상호관용·절제가 밑바탕
고도의 경제성장과 선순환하며 발전
집권세력의 법·권력 극단 사용 위험
판사탄핵, 韓 민주주의에 숙제 남겨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Brexit), 백인 민족주의의 발호, 반이민주의, 포퓰리즘 등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현상들이 전 세계적으로 위력을 발휘하면서 민주주의의 퇴조 현상과 그 원인을 진단하는 연구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작동 불능 현상이 유럽과 미국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면서 과연 민주주의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나 하는 궁금증 또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후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자유주의 진영에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황금기를 구가한 데는 고도의 경제성장이라는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고도성장기에 서구 사회는 복지 정책 확대, 사회 안전망 확충, 노동자 권리 보장, 대학 교육 보편화, 소수 인종에 대한 정치 참여 보장 등을 통해 전반적으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한편 권위주의 사회에서 시민혁명을 거쳐 민주화로의 이행을 경험한 한국과 같은 나라의 경우 산업화의 성과로 교육 수준이 높은 중산층이 성장하면서 정치 참여의 요구가 높아져 결국 참여를 억압한 권위주의 정권이 전복되는 전기가 마련됐다. 결국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요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처럼 민주주의는 만들어내고, 베풀고, 나눠주면서 나름대로 성장하고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곳간의 민주주의만큼 많은 식자들이 민주주의의 성장 조건으로 보는 것은 의회에서 통과시킨 법도 아니요 정부가 만들어낸 규제도 아닌 사회 구성원 간에 말없이 통용되는 다양한 민주적 규범들이었다. 전후 서구 민주주의 사회는 꾸준한 경제성장의 결과 풍요를 누리고 소수 인종의 유입이 적어 국민적 동질성을 구가하는 가운데 민주적 규범을 준수, 유지할 수 있었다. 법대로 꼬치꼬치 따지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심전심 서로 통하는 규범을 통해 크게 이탈하지 말아야 할 한계선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법률만큼이나 통상의 규범과 관행에 기대 살아왔다. 그만큼 살기가 편했고 사회적 비용도 적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특히 정치권의 원만한 운영을 가능하게 해준 규범으로 많은 학자들이 상호 관용과 절제를 꼽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권은 서로 다른 정당들이 국민을 대변하면서 국정을 논의하는 곳이며 이에 따라 사회의 필요에 부응하는 공공재인 법률을 적시에 제공할 의무가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여러 정당과 정파는 매사에 헌법과 법률의 조문을 두고 서로 따지면서 공방하는 강경 노선보다는 반대 세력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호 양해되고 전통적으로 통용되는 규범을 준수하면서 공존해왔다. 동시에 언제든지 정권을 내놓을 수 있고 다시 찾을 수도 있다는 신념에 토대해 다수당 혹은 집권 세력도 권력을 절제된 형태로 행사했다. 그리고 집권 세력의 내부에는 항상 회의(懷疑)하고 성찰하며 타협을 모색하는 상당수의 중도파가 존재했다. 즉 정당 간 민주적 타협의 선행 요건으로 정당 내부의 민주적 의사소통이 작동됐다. 그리고 정치권은 딱딱한 헌법과 법률의 규정을 극단적·정파적으로 활용하는 강성 게임보다는 절제와 상호 관용 속에서 정책 경쟁과 건설적 논쟁을 중시하는 연성 게임을 추구해왔다. 이러한 규범이 경제성장이라는 곳간의 인심과 함께 전후 민주주의 사회가 성장할 수 있게 해줬던 보이지 않는 안전판이었다. 한마디로 잘 나가던 시기의 민주주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좀처럼 막판까지 가보자는 게임을 하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한 판사 탄핵은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와 관련해 큰 숙제를 안겨주는 선례가 됐다. 대통령제와 대통령중심제가 다르듯이 헌정주의와 헌법의 극단적 사용은 구별돼야 한다. 거대 다수당에 의한 판사 탄핵은 민주주의를 지탱해주는 절제된 권력의 사용이라는 규범이 공공연히 침해되는 경로를 열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된다. 그러지 않겠지만 탄핵의 일상화는 정치의 형해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복원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론독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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