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에 단돈 5천원..'법정 안팎의 의인' 백기완 / 한승헌
고인이 되신 백기완 선생이 겪은 수난 내지 박해엔 법정이라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특수 공간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변호인인 나는 증언자의 소임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할 때가 있다.
박정희의 폭주가 끝날 줄 모르자 대학가 반정부 시위가 격화됐고, 1973년 12월엔 마침내 함석헌·윤보선 등 지도급 인사를 망라한 ‘개헌청원운동본부’가 장준하, 백기완의 주도 아래 ‘유신헌법 폐지 1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박 정권이 최악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대증요법으로 긴급히 내놓은 조치가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였다. 초법적인 엄벌 위협에도 불구하고 반유신 개헌운동은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번져나갔다. 그리고 긴급조치 1호 위반 첫 사건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사상계> 주간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장준하(58), 그리고 통일운동가이자 백범사상연구소장이던 백기완(42), 이 두 사람이 긴급조치 재판극의 첫 배역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긴급조치(긴조) 사건은 일반법원이 아닌 비상보통군법회의가 1심, 비상고등군법회의가 2심, 대법원이 최종심이었다. 이름부터 ‘비상’이 ‘보통’에 얹혀 있으니 피차에 어리둥절했다.
나는 백기완 선생의 변호인이 되었다. 장준하, 백기완 두 사람은 긴조 1호가 나온 지 5일 만에 중앙정보부로 연행 구속되어 12일 만에 기소, 6일 뒤 첫 공판, 바로 다음날 판결 선고 식으로 초고속 질주로 1라운드가 끝났다. 서울 삼각지 국방부 청사 근처 언덕바지에 있는 군용 퀀셋 안에서 비상보통군법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정작 공소장에는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결성하고 100만인 서명운동에 들어간 행위는 이른바 모두(冒頭)사실, 즉 처벌 대상인 ‘범죄사실’이 아니라 그 전 단계의 경과사실로 기재되어 있었다. 긴급조치가 발표된 1월8일 이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소급적용’을 하지 않았다는 몰골로 보였다. 그러다 보니 막상 공소사실에는 긴급조치를 비난하는 말 몇 마디만 남게 되었다. 예컨대, “국민이 대통령에게 개헌청원도 못한단 말인가” “개헌이란 ‘개’ 자만 말해도 잡혀가게 되어 있으니, 이런 놈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라는 등의 말을 함으로써 대통령 긴급조치를 비방하고(장준하), 또는 “이런 조치는 대통령이 더 오래 해먹겠다는 이야기니 나는 15년 징역을 살고 나오면 백기완 옹이 되겠구나”라는 말을 함으로써 대통령 긴급조치를 비방하고(백기완)…,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서 자못 희극적이었다. 긴급조치 1호에는 유신헌법 비방뿐 아니라 ‘이 조치를 비방하는 자’ 역시 긴조 위반으로 처벌한다는 조항이 있었던 것이다. 그 저인망식 표현에 냉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변호인인 나와 백기완 선생 사이에는 이런 법정 문답도 오갔다.
변호인(변): 이번에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을 때에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고는 단돈 5000원뿐이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백기완(백): 예, 딱 5000원밖에 없었습니다.
변: 그동안 전국민적인 개헌운동을 주도해오시면서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을 터인데요?
백: 아닙니다. 민주주의와 통일을 열망하는 엄청난 민심이 바로 우리들의 자금이요, 힘이었으니까요.
내가 그런 질문을 한 데는 개헌운동에 대한 국민적 공감과 백 선생의 헌신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당사자인 백 선생도 그때를 회고하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어찌해서 그 많은 변호사 반대신문과 변론 요지를 빼고 굳이 이 대목을 상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 한승헌 변호사의 날카롭고 당당한 백기완 변론의 알짜가 살아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반박정희 기류와 온 민중의 염원이 객관화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라고도 했다.
그런데 역시 중정에 끌려온 장준하 선생의 호주머니에서는 단돈 180원이 나왔다. 담배 한 갑 값도 안 되는 푼돈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1월31일 첫 공판에서 군 검찰관은 두 피고인에게 각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구형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2월1일) 재판부는 전날의 검찰관 구형과 똑같은 15년형을 두 사람에게 선고했다. 나는 두고두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정찰제는 대도시의 백화점에서 확립된 것이 아니라, 서울 삼각지의 군용 퀀셋 안에서 군법회의 판결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고 부끄러운 ‘판결’이었다.
이게 ‘개판’이지 무슨 재판이냐고 분개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어디까지나 군법회의니까, 다시 말해서 회의 결과에 불과하니까 그리 알고 넘어갑시다.” 내 그런 말을 듣고 바뀐 것은 아니겠지만, 그 뒤 ‘군사법원’이라고 개명을 해서 지금은 ‘회의’ 소리는 면했는지 모르겠다.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도 상고 기각으로 끝났다. 박 정권이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해, 법률로도 할 수 없는 짓을 대통령 명령 하나로 15년 징역을 먹이는 판이었으니, 황당하면서도 만만치 않은 공포 분위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명색이 변호사인 제가 ‘정찰제’ 타령이나 하고 저 할 일 다 한 듯이 알고 살아온 것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백 선생님!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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