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현실을 바꾸는 '쇼'를 하라 / 이세영
[한겨레 프리즘]
이세영
정치팀장
정치의 본령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반면 미학(예술)은 현실 세계를 재현(표현)하는 데 주력한다. 정치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통치자는 정치를 미학으로 대체하려는 욕망에 포획되기 쉽다.
모든 것의 해결을 공언했으나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통치자가 취할 선택지는 많지 않다. 가장 손쉬운 게 30~40%의 지지층이라도 확실히 붙들고 가는 거다. 농도 짙은 감동, 뭉클한 공감, 지도자와의 순연한 일체감이 빈번하게 요구된다. 메시지와 의전의 비중이 커지고, 정치는 건조한 통치술을 넘어 미학화된다.
정치의 미학화는 정치의 사법화만큼이나 문제적이다. 정치와 정책을 통한 문제의 ‘실제적 해결’ 대신 이미지와 스펙터클을 동원한 ‘상징적 해소’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인천공항 화물터미널을 찾아 코로나 백신 수송·보관 훈련을 참관하고, 그 장면을 전국에 송출하는 것은 미학화된 정치의 전형이다. 유관 기관이 미리 정한 일정과 매뉴얼에 따라 시행하는 훈련을 굳이 대통령이 나가 살펴야 할 이유는 많지 않다. 경호와 의전에 따른 현장의 부하를 감수하면서까지 대통령이 주인공인 스펙터클을 연출했다면, 그 배경에 백신 확보가 부진한 상황에 대한 비판을 어떻게든 무마해 보려는 속내가 없다고도 말하기 어렵다.
‘정치의 미학화’와 대척하는 지점에 ‘미학의 정치화’가 있다. 정치의 미학화가 문제 해결이 안 되는 현실을 ‘견디게’ 만든다면, 미학의 정치화는 무언가를 드러내고 표현함으로써 집합적 감성 구조에 변화를 일으키고, 이를 통해 현실을 ‘극복하게’ 만든다. 발터 베냐민은 이런 ‘정치화된 미학’의 사례로 1·2차 세계대전 사이 중서부 유럽과 러시아에 등장했던, 새로운 예술로 삶의 내용과 형식을 바꾸려 했던 전위 예술운동을 꼽았다.
지난주 질병관리청은 아스트라제네카의 코로나 백신 접종 대상에서 65살 이상 고령층을 제외하기로 했다. 세계보건기구와 유럽연합 등이 사용을 허가·권고한 이 백신이, 고령층에 효과가 있음을 입증하는 데이터가 충분히 누적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상반기 국내에 들어올 백신 물량의 대부분(1000만명분)을 차지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고령층 접종 유예 조치에도 불구하고 아스트라제네카에 대한 불신이 전면적으로 확산될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1차 접종 대상인 요양병원·시설 수용자와 의료진의 90% 이상이 접종에 동의했다는 보건 당국의 발표도 나왔다. 그럼에도 아스트라제네카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아직은 높은 수준이라 보기 어렵다. 예방 효과가 94~95%에 이르는 모더나·화이자를 두고, 그보다 효과가 떨어지는 백신을 굳이 맞아야 하느냐고 불안감을 호소하는 이 또한 상당하다. 하지만 일반 독감백신의 예방 효과가 60%가 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그 수치가 70.4%에 이르는 아스트라제네카의 대규모 접종이 가져올 효과는 매우 크다는 게 보건의료계의 일치된 견해다.
전문가들은 보건 당국이 목표하는 ‘집단 면역’에 도달하기 위해선, 백신 물량의 신속한 확보와 함께, 빠르고 체계적이며 광범위한 접종 실시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려면 필요 물량 확보를 위한 다각도의 노력은 물론, 대량 확보가 용이한 백신에 대해 국민의 ‘심리적 수용성’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
사정이 이렇다면, 정치권과 의료계 일부가 제안하듯 대통령과 정부 고위직들이 앞장서 아스트라제네카를 맞는 것도 진지하게 검토할 만하다. 정부 스스로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고 밝힌 백신인 만큼, 국민을 안심시키고 수용성을 높이는 차원에서 대통령이 ‘선도 접종’을 받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치적 결단의 문제다.
미증유의 팬데믹 정국에서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 구성원의 인식을 바꿔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치화된 미학’(미학의 정치화)이다. 보여줌(showing)으로써 현실을 은폐하는 미학화된 정치와 달리, 정치화된 미학은 보여줌으로써 현실을 바꾼다. ‘또 쇼냐?’는 냉소를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쇼라고 다 같은 쇼가 아니다.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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