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만취해 기억 잃은 상태라면 강제추행 해당"
[조성은 기자(pi@pressian.com)]
스스로 걸을 수 있었어도 추행에 저항할 능력이 떨어질 정도로 술에 취한 피해자와 성관계를 가지면 준강제추행죄가 인정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음주 후 단기 기억상실(알코올 블랙아웃)을 '심신상실'로 봐야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21일 준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공무원 김모 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수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알코올의 영향은 개인적 특성 및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며 "피해자가 스스로 걸을 수 있다거나 자신의 이름을 대답하는 등의 행동이 가능했다고 해서 범행 당시 심신상실 상태에 있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피해자와 김 씨의 관계, 연령 차이, 만나기 전까지의 상황, 모텔에 가게 된 경위 등을 비춰볼 때 피해자가 성적 관계를 맺는 것에 동의했다고 볼 정황은 확인할 수 없다"면서 "피해자는 당시 술에 만취해 잠이 드는 등 심신상실 상태에 있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의식상실 상태는 아니지만 알코올 영향으로 추행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다면 준강간죄나 준강제추행죄를 적용할 수 있다"며 "깊은 잠에 빠져 있거나 술·약물 등에 의해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은 상태 또는 그와 같은 사유로 정상적인 판단능력과 대응·조절 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면 준강제추행에서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경찰 공무원인 김 씨는 2017년 2월 새벽 경기 안양시의 한 빌딩 앞에서 술에 취해 있던 피해자(당시 미성년자)를 모텔로 데려가 강제 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피해자는 소주 2병을 마신 후 친구들과 노래방에 갔다가 혼자 화장실에 간다며 나온 상태였다. 외투도 걸치지 않고 휴대전화도 둔 채 친구의 신발을 신고 나와 노래방을 찾지 못하고 길을 헤매고 있을 정도의 만취 상태였다.
당시 귀가 중이던 김 씨는 피해자를 발견하고 "예쁘다"며 말을 걸었다. 피해자와 대화를 나누던 김 씨는 '좋은 감정이 들었다'며 피해자를 데리고 술을 마시러 갔다. 그러나 만취한 피해자가 술집 테이블에 엎드려 잠을 자자 모텔로 데려갔다. 김 씨는 피해자 친구의 실종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혔다.
김 씨는 "피해자가 '한숨만 자고 싶다'고 말해 모텔로 데려갔다"고 주장했다. 반면 피해자는 "화장실에서 구토한 뒤 필름이 끊겼다"고 했다.
1심은 피해자가 술에 만취해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읽고 겨울에 외투도 입지 않은 채 일행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공무원인 김 씨가 어린 피해자를 보호해야 함에도 모텔로 데려가 추행하고 아직도 '첫눈에 서로 불꽃이 튀었다'는 등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며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반면 2심은 모텔 폐쇄회로(CC)TV 영상 등에 비춰 피해자가 비틀거리지 않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모텔 카운터 직원도 두 사람이 편안하게 모텔로 들어갔다고 진술한 점을 들어 "피해자가 성관계에 동의했지만 기억을 못하는 '블랙아웃' 상태가 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김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가 심신상실 상태가 아니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피해자가 △짧은 시간 동안 술을 많이 마셔 구토를 할 정도로 취해 △소지품과 일행을 찾지 못할 정도였으며 △처음 만난 김 씨와 함께 모텔에 가서 무방비 상태로 잠이 들고 △경찰이 피해자를 찾아 모텔에 왔는데도 그대로 누워 있었을 정도로 만취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판단능력과 신체적 대응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상태"라며 "2심은 준강제추행의 구성요건인 심신상실 상태에 대한 법리를 오해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가 동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편 대법원은 이번 사건 심리 과정에서 '블랙아웃' 상태의 범죄에 심층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고 법원행정처를 통해 외부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조성은 기자(pi@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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