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의 세계+] 하나도 근사하지 않은 방황

한겨레 2021. 2. 2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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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은 아름답고 순수한 시절로 표현되곤 하지만, 삶이 대개 그렇듯 그때 역시 좋고 나쁨이 혼재된 시절일 것이고 당연히 사람에 따라 그 비율은 다를 것이다.

'나'에게 비인간적인 행동까지 강요했던 친구, 아니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과거의 군주 '균수'는 고기를 사주며 가족까지 불러들여 인사를 하게 하는데, '나'는 차근차근 떠오르는 그 시절의 아픈 기억을 감당하는 것도, 다정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된 균수를 마주 보는 것도 괴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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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의 세계+]

한 학교에서 열린 학교폭력 예방 캠페인에 참여한 학생들이 팻말을 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조해진 |  소설가

학창시절은 아름답고 순수한 시절로 표현되곤 하지만, 삶이 대개 그렇듯 그때 역시 좋고 나쁨이 혼재된 시절일 것이고 당연히 사람에 따라 그 비율은 다를 것이다. 물론 현재까지 침범하는 치명적으로 나쁜 기억을 갖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을 터이다.

최근 스포츠인과 연예인 일부가 피해자의 학폭(학교폭력) 폭로로 출전 중지와 국가대표 박탈, 오디션 프로그램 하차 같은 일신상의 변화를 겪었다. 어렵게 얻은 기회를 잃은데다 사회적 비난까지 감당하는 상황은 무척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그동안 수없이 과거의 아픔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의 고통에 비한다면 적은 분량으로 체감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과거의 학폭을 현재로 소환하여 단죄하는 것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안다. 과거의 우리는 현재의 우리보다 천진하게 잔인했을 게 분명하고, 그때의 미묘한 갈등과 폭력의 과정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나는 안다. 분명 아픔이 있(었)는데, 그 아픔을 둘러싼 기억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없던 일로 무마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백가흠의 소설집 <사십사>에 수록된 ‘한 박자 쉬고’는 주인공 ‘나’가 고등학교 시절 돈을 빼앗고 폭력을 휘둘렀던 동창을 동네 카페에서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된다. ‘나’에게 비인간적인 행동까지 강요했던 친구, 아니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과거의 군주 ‘균수’는 고기를 사주며 가족까지 불러들여 인사를 하게 하는데, ‘나’는 차근차근 떠오르는 그 시절의 아픈 기억을 감당하는 것도, 다정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된 균수를 마주 보는 것도 괴롭기만 하다. 균수는 미안하다고, 이렇게라도 만나 홀가분하다고 고백하지만 ‘나’는 도무지 그를 용서할 수 없어서, 그러나 현재의 ‘나’는 스스로 볼품없게만 느껴지고 그의 현재는 너무도 정상적으로 보여서, 무엇보다 그의 과거를 모르는 아내와 어린 자녀들이 곁에 있기에 별다른 반격을 못 한 채 그저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여러 아이러니가 중첩된 ‘한 박자 쉬고’가 과거의 트라우마에 집중한다면, 이기호의 ‘한정희와 나’(소설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폭력을 응시하는 작품이다. ‘나’의 집에 맡겨진 한정희는 어린 시절 아내를 잠시 돌봐주었던 임시보호자의 손녀인데, 어느 날 ‘나’는 정희가 학폭 가해자로 지목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문제는 정희의 태도이다. 폭력이 아니라 놀이였을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가 하면 작가인 ‘나’에게 사과문을 대신 써달라고 장난스럽게 부탁까지 하는 것이다. ‘나’는 결국 폭발하게 되고 정희는 ‘나’의 집에서 떠난다. 소설은 정희의 소식마저 알 수 없게 된 ‘나’가 이제 남은 삶에서는 더 이상 진정한 환대는 없으리란 걸 예감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소설이 해답을 제시하는 장르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두 작품을 다시 읽는 동안 내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학교폭력에는 늘 상반된 진실이 충돌하고 해답을 찾는 과정마다 윤리적 질문이 뒤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어떤 폭력도 그 폭력을 당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소거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열살 무렵, 학교에서 2년 정도 언어폭력을 당해본 경험자로서 한 치의 의심 없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가끔 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하게 되면 꼭 해주는 말이 있다. 성장을 위해 방황할 수는 있지만 그 방황 속에서 그 사람이 상처를 줄 수 있는 대상은 자신뿐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폭력적인 말과 행동으로 아픔을 주며 그것이 방황의 표식이라고 우기는 것은 하나도 근사하지 않다고, 근사하지 않은 사람, 적어도 그런 어른으로는 성장하지 말아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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