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말살하는 '학교 폭력'.. 제대로 된 처벌 못 하는 사회 [뉴스+]
성인 된 후에도 트라우마 남아
"응당한 처벌·진정한 사과 필요"
스포츠계 학폭 미투 잇단 돌출
스포츠 강국 '한국의 그늘' 드러내
개정된 '최숙현법' 2월 19일 시행
인권침해 징계 전력 땐 국대 제한키로
끊이지 않는 폭로 왜
사태 발생하면 쉬쉬하기 급급
시간 지나 가해자만 행복한 삶
가정·학교·사회적 책임 강화해야
학교 밖 사이버불링 해법은
사이버불링만 담당 외부전문인력 갖춰야
잊고 살려 했던 기억이 불쑥 떠오른 건 최근 학교폭력 폭로가 잇따르면서다. A씨는 “평소 멀쩡하게 봤던 이들이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것을 보니 날 괴롭혔던 아이들도 지금 어딘가에서 멀쩡한 척 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동안 상처를 잊은 척 살았지만 사실은 하나도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너무 괴롭다”고 토로했다.
최근 배구선수 이재영·다영 자매 등 유명인의 학교폭력이 잇따라 폭로되면서 학교폭력의 심각성과 폐해가 재조명되고 있다. 많은 피해자들은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가 남았다고 말한다. 가해자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잇따른다.
16일 다수 논문에 따르면 학교폭력 피해 학생들은 우울과 불안, 예민함 등의 피해를 공통적으로 호소했다. 특히 장기간 피해를 본 학생들은 자아 존중감이 낮아지고,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피해 경험은 타인에 대한 경계나 신뢰 결핍으로 이어져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방해하기도 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최근 유명인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폭력 폭로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남는 트라우마 때문”이라면서 “피해자들은 과거에 겪은 억울함과 상처 등을 지금이라도 치유하고 사과받고 싶어 폭로에 나선 것”이라고 밝혔다.
피해자는 계속 나오고 있다.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응답은 2017년 0.9%(약 3만7000명)에서 2019년 1.6%(약 6만여명)까지 늘었다.
겨울스포츠 최고 인기스타에서 학교폭력 가해자로 전락한 이재영· 다영(25·이상 흥국생명) 쌍둥이 자매의 파문이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이들은 지난 10일 과거 학교폭력 전력이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폭로된 뒤 많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고, 결국 15일 소속팀과 국가대표팀으로부터 무기한 출장정지라는 징계를 받기에 이르렀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대표팀 주전 세터로 뛰며 ‘2대 연속 국가대표’로 화제를 모은 자매의 모친 김경희씨도 함께 비판을 받았다. 부모의 입김 속에 이들이 학창시절 경기 등에서 과도한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 ‘쌍둥이를 국가대표로 키운 어머니’라는 부러움을 샀던 김씨는 이제 ‘경기에 관여한 어머니’로 비판의 중심에 섰다. 하루 전에는 대한민국배구협회가 김씨에게 수여한 ‘장한 어버이상’도 취소되는 등 가족 모두가 추락했다.
여기에 이들 폭로가 방아쇠가 돼 송명근(28), 심경섭(30·이상 OK금융그룹) 등 남자선수의 학교폭력 전력까지 드러났고, 이들도 마찬가지로 국가대표팀에서 무기한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다른 프로 종목에도 ‘학폭 미투’가 번지는 양상이다. 학교폭력이 일부 종목만의 문제가 아닌 탓이다. 프로야구에서는 이미 키움 안우진이 2018년 학교폭력 문제로 50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다. 지난해 NC는 1차 지명했던 김유성을 문제가 불거지자 지명 철회했고, 결국 김유성은 프로 진출이 좌절됐다. 또한, 지난해 신인드래프트 당시에도 몇몇 선수들이 학교폭력 문제가 제기됐고 결국 지명이 유력했던 선수들이 프로 구단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의혹을 받았지만 지명된 선수도 있었는데 이들은 구단이 면밀히 조사하고 해당 학교 감독에게 사실 확인서를 받는 등의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요소는 남아있다.
KOVO 비상대책회의 프로배구에서 촉발된 학교폭력 사태가 체육계 전반으로 번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16일 서울 상암동 한국배구연맹에서 ‘학교폭력 근절을 위한 비상대책회의’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
프로배구에서 촉발된 학교폭력 문제가 체육계를 강타하고 있는 가운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동부 징계이력 통합 관리 등의 관련 대책을 내놨다.
문체부는 16일 프로스포츠 선수 학교폭력 사건과 관련해 “교육부 등 관계 당국과 협의해 학교 운동부 징계이력을 통합 관리해 향후 선수 활동 과정에 반영하겠다”고 전했다. 아울러 문체부는 “대한체육회 국가대표선발규정 제5조에 따라 (성)폭력 등 인권 침해로 징계를 받은 적이 있는 경우 국가대표 선발을 제한한다”며 “향후 관련 규정 등을 통해 학교체육 폭력 예방 체계를 구축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문체부는 교육부 등 관계 기관 및 단체와 점검 회의를 개최해 발 빠르게 대책을 마련했다. 하루 전 문재인 대통령이 황희 신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폭력 등 체육분야 부조리를 근절할 특별 노력을 기울일 것을 주문한 데 따른 대응이다.
고개 숙인 KOVO 사무총장 신무철 한국배구연맹(KOVO) 사무총장이 지난 16일 서울 상암동 한국배구연맹에서 열린 ‘배구계 학교폭력 근절 및 예방을 위한 비상대책회의’를 마친 뒤 결과를 발표하기에 앞서 고개 숙여 학교폭력 피해자들과 배구팬들에게 사과하고 있다. 뉴스1 |
문체부는 이번에 시행되는 제도와 별개로 팀 해체, 계약 거부 등으로 경력 단절 및 은퇴 위기에 처한 선수들에게 전문 조력자(에이전시)를 연계해 훈련 및 대회 참가 등 선수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도 마련한다.
◆제때 처벌 못한 학폭, '사회적 처벌' 불렀다
“그들이 일궈낸 성과는 폭력과 갑질로 이뤄낸 것이다. 더 이상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청소년들에게 ‘학교폭력을 저지르면 이렇게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
◆ “가해자 꼭 단죄” 공감대… 처벌수위 놓고선 논란 ‘분분’
최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학교폭력 미투’가 연달아 터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많은 사람이 사회적 처벌에 기대고 있는 것은 한편으론 가해자 처벌이나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학교폭력 사건 처리 체계를 개선하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과거에 이미 벌어진 사건들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지금 바꾼다면 10년 뒤 나올 폭로는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처벌 못 하는 사회
“현 제도는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합니다. 사회적인 처벌이 공론화돼야 합니다.” 최근 배구선수 이다영·이재영 자매의 학교폭력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이번 사태를 본 많은 이들은 사회적 처벌이 ‘정의’라고 말한다. 학교폭력은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만큼, 가해자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선수가 지핀 학교폭력 논란은 체육계를 넘어 사회 전방위적으로 번지고 있다.
특히 일반인의 경우 학교폭력 가해자라고 해서 그가 속한 기관·회사에서 징계 등의 처벌을 받는 것이 정당하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김영미 변호사(법무법인 숭인)는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합당한 처벌이 이뤄져야 하는 것은 맞다”면서도 “판단력이 부족한 시기에 한 행동으로 성인이 된 뒤의 성과를 박탈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오래전 발생한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지는 것은 바꿔말하면 과거에 사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했다는 의미다. 법 집행 기관과 교육당국 대응에 대한 불신이 표출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학교폭력은 별도의 처벌 법률이 있지 않고, 정도가 심할 경우 일반 폭행·상해 등의 혐의가 적용된다. 경미한 징계의 경우 처음에는 생활기록부에도 기록하지 않게 돼 있는 등 가해자에게 유리한 체계라는 지적이 많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교폭력위원회 등을 거치지 않고 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학교폭력 해결업체’까지 등장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학교폭력을 방지하고, 심리 상담 등 학폭 피해자를 구제할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학교폭력 예방 지원단체인 푸른나무재단의 이선영 상담팀장은 “학교폭력 폭로를 지켜보며 가장 안타까운 것은 ‘10년 전 그때’ 해결했어야 했다는 것”이라며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사건을 축소하거나 쉬쉬하지 않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회복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학교폭력은 기존 신체 폭력보다 사이버폭력·언어폭력 등 관계에 기반하는 ‘관계 폭력’이 심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교육현장인 학교에는 이런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사실상 전무한 게 현실이다.
17일 교육계 관계자 등에 따르면 최근 학교폭력 양상이 기존과 다른 유형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모습이다. 물리적 가해 위주였던 과거와 달리 스마트폰 보급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용 확산 등으로 사이버폭력과 언어폭력 비중이 늘고 폭력 피해장소 역시 ‘학교 밖’ 비중이 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교육부와 교육청이 발표한 학교폭력 실태조사에서도 이 같은 변화가 드러난다. 학교폭력 중 사이버폭력 비중은 2018년 8.7%, 2019년 8.9%, 2020년 12.3%로 매년 증가했다. 폭력 피해장소 역시 학교 밖인 경우가 2019년 25.1%, 2020년 35.7%로 1년 새 10%나 늘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온라인 교육 확산으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학교폭력은 ‘사각지대’로 더 많이 숨어들어 갈 것으로 예측된다.
이와 관련해 교육기관들 역시 현장의 어려움을 인지하고 있다고 답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사이버 학교폭력으로 접수된 사건 중 유튜브 등 외국 사이트에서 벌어진 경우 가해 댓글이나 게시물을 지워버리면 수사기관에서도 조사하기 어려워하는 걸로 알고 있다”며 “학교와 교사들이 접근해 조사하는 건 더 어렵기 때문에 교사들이 사이버폭력 대응에 어려움을 호소한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학교폭력 예방 프로그램에서 사이버폭력을 따로 분리해 진행하는 등 사이버폭력 대응 강화를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유지혜·이희경·이강진·서필웅·송용준·김유나·이종민·박지원 기자 kee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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