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말살하는 '학교 폭력'.. 제대로 된 처벌 못 하는 사회 [뉴스+]

박지원 2021. 2. 20.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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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 지울수 없는 상처
성인 된 후에도 트라우마 남아
"응당한 처벌·진정한 사과 필요"
스포츠계 학폭 미투 잇단 돌출
스포츠 강국 '한국의 그늘' 드러내
개정된 '최숙현법' 2월 19일 시행
인권침해 징계 전력 땐 국대 제한키로
끊이지 않는 폭로 왜
사태 발생하면 쉬쉬하기 급급
시간 지나 가해자만 행복한 삶
가정·학교·사회적 책임 강화해야
학교 밖 사이버불링 해법은
사이버불링만 담당 외부전문인력 갖춰야
두 아이의 엄마인 직장인 A(33)씨는 요즘 자주 악몽을 꾼다.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놀림거리가 되는 꿈이다. A씨를 괴롭히는 이들의 얼굴은 나오지 않지만, 잠에서 깨면 늘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16년 전, 고등학생인 A씨를 따돌리고 괴롭히던 같은 반 아이들이다.

잊고 살려 했던 기억이 불쑥 떠오른 건 최근 학교폭력 폭로가 잇따르면서다. A씨는 “평소 멀쩡하게 봤던 이들이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것을 보니 날 괴롭혔던 아이들도 지금 어딘가에서 멀쩡한 척 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동안 상처를 잊은 척 살았지만 사실은 하나도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너무 괴롭다”고 토로했다.

최근 배구선수 이재영·다영 자매 등 유명인의 학교폭력이 잇따라 폭로되면서 학교폭력의 심각성과 폐해가 재조명되고 있다. 많은 피해자들은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가 남았다고 말한다. 가해자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잇따른다.

16일 다수 논문에 따르면 학교폭력 피해 학생들은 우울과 불안, 예민함 등의 피해를 공통적으로 호소했다. 특히 장기간 피해를 본 학생들은 자아 존중감이 낮아지고,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피해 경험은 타인에 대한 경계나 신뢰 결핍으로 이어져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방해하기도 했다.

지난해 발표된 논문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사회불안에 미치는 영향: 거부민감성의 매개효과’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타인에게 거부당하는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부민감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학창 시절 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는 B씨는 “원래 활발했는데 따돌림을 당한 후 성격이 많이 변했다”며 “사회생활을 할 때도 ‘저 사람들이 날 안 좋게 보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들 때가 있다.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C씨는 “나를 괴롭혔던 애들이 대기업에 다니거나 공무원이 됐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괴롭다”며 “정작 가해자들은 잘사는 것을 보면 억울하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최근 유명인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폭력 폭로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남는 트라우마 때문”이라면서 “피해자들은 과거에 겪은 억울함과 상처 등을 지금이라도 치유하고 사과받고 싶어 폭로에 나선 것”이라고 밝혔다.

피해자는 계속 나오고 있다.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응답은 2017년 0.9%(약 3만7000명)에서 2019년 1.6%(약 6만여명)까지 늘었다.

전문가들은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사회가 적극 대처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학교폭력은 지능화·조직화해 성인들의 폭력과 비교해도 죄질이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이럴 때는 형사사건으로 취급해 공권력이 적극 개입해야 한다. 폭력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에 대한 조치가 제때 이뤄지는 것이 트라우마 등 2차 피해를 막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이재영(오른쪽)·이다영 자매가 지난해 열린 프로배구 컵대회에서 경기 뒤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뉴스1
◆배구서 깨진 ‘침묵의 카르텔’… 다른 종목으로도 확산 조짐

겨울스포츠 최고 인기스타에서 학교폭력 가해자로 전락한 이재영· 다영(25·이상 흥국생명) 쌍둥이 자매의 파문이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이들은 지난 10일 과거 학교폭력 전력이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폭로된 뒤 많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고, 결국 15일 소속팀과 국가대표팀으로부터 무기한 출장정지라는 징계를 받기에 이르렀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대표팀 주전 세터로 뛰며 ‘2대 연속 국가대표’로 화제를 모은 자매의 모친 김경희씨도 함께 비판을 받았다. 부모의 입김 속에 이들이 학창시절 경기 등에서 과도한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 ‘쌍둥이를 국가대표로 키운 어머니’라는 부러움을 샀던 김씨는 이제 ‘경기에 관여한 어머니’로 비판의 중심에 섰다. 하루 전에는 대한민국배구협회가 김씨에게 수여한 ‘장한 어버이상’도 취소되는 등 가족 모두가 추락했다.

여기에 이들 폭로가 방아쇠가 돼 송명근(28), 심경섭(30·이상 OK금융그룹) 등 남자선수의 학교폭력 전력까지 드러났고, 이들도 마찬가지로 국가대표팀에서 무기한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들의 향후 지도자 생활에도 큰 걸림돌이 놓였다. 대한민국배구협회는 “학교폭력 가해자로 판명된 선수는 지도자 자격을 획득할 때도 결격 사유가 생긴다. 지도자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중징계 경력은 제한 사항이 된다”고 전했다. 가해자들이 모두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격을 얻는 데 ‘학교 폭력 이력’은 엄청난 감점 대상이 돼 이들이 학교나 프로팀 등 협회 산하 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할 가능성이 크게 줄었다. 배구 인기를 견인했던 스타들이 이제는 미래를 걱정할 지경까지 이른 셈이다.
학교폭력 전력이 드러나 프로배구계에 파문을 일으킨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의 소식이 전세계 언론에 속속 보도됐다. 사진은 자매의 뉴스를 다룬 영국의 데일리메일 캡처.
이런 극적인 몰락을 해외 언론들도 놓치지 않았다. 영국의 ‘데일리 메일’은 15일(현지시간) “쌍둥이 배구 스타가 과거 학교폭력이 알려지면서 국가대표팀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는 제목으로 소식을 전달했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도 이들의 이야기가 보도됐다. SCMP는 자매가 다수의 TV 예능 프로그램과 자동차 광고 등에 출연하며 유명인 지위를 누렸지만, 이들이 나온 프로그램과 광고 영상은 재빠르게 삭제 조처됐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세계 배구 소식을 전하는 ‘월드오브발리’와 프랑스의 ‘프랑스24’, 다수의 일본 매체들도 이들의 소식을 보도했다.
이들의 부끄러운 소식이 전달되며 한국 스포츠의 어두운 일면까지 속속 드러났다. 데일리 메일은 한국이 하계·동계 올림픽 10위 안에 드는 스포츠 강국이지만, 신체·언어적 폭력이 만연하다면서 최숙현(철인 3종), 심석희(쇼트트랙) 등의 사건을 사례로 소개했다.
대한민국 빙상 간판선수를 상대로 수년간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재판을 받게된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 뉴시스
배구계 전체가 발칵 뒤집히며, 해외에까지 뉴스가 보도될 지경이지만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스포츠계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발언 기회를 얻지 못했던 피해자들이 이번 사태가 벌어진 뒤에야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미 추가 폭로도 나왔다. 수도권 소재 모구단 인기 선수에 대한 폭로가 지난 14일 온라인상에 올라왔고, 하루 뒤에는 해당 선수가 피해자에게 연락해 폭력 행사 진위 여부에 항의를 했다는 글까지 추가로 게시됐다. 16일에는 서울 소재 구단의 신인 선수의 초등학교 시절 폭력 행사 전력이 도마에 올랐다. 글쓴이는 “가해자가 모 배구단에 입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단에 연락을 했지만 구단이 오히려 회유를 했다”고 주장했다.

다른 프로 종목에도 ‘학폭 미투’가 번지는 양상이다. 학교폭력이 일부 종목만의 문제가 아닌 탓이다. 프로야구에서는 이미 키움 안우진이 2018년 학교폭력 문제로 50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다. 지난해 NC는 1차 지명했던 김유성을 문제가 불거지자 지명 철회했고, 결국 김유성은 프로 진출이 좌절됐다. 또한, 지난해 신인드래프트 당시에도 몇몇 선수들이 학교폭력 문제가 제기됐고 결국 지명이 유력했던 선수들이 프로 구단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의혹을 받았지만 지명된 선수도 있었는데 이들은 구단이 면밀히 조사하고 해당 학교 감독에게 사실 확인서를 받는 등의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요소는 남아있다.

프로농구의 경우 이번 사태가 벌어지면서 각 구단을 통해 조사에 들어간 상태지만 확인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아 난감한 상황이다. 결국, 프로야구나 프로농구 등 다른 종목들도 피해자의 폭로가 나오기 전에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시한폭탄을 안고 가는 심정이다.
KOVO 비상대책회의 프로배구에서 촉발된 학교폭력 사태가 체육계 전반으로 번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16일 서울 상암동 한국배구연맹에서 ‘학교폭력 근절을 위한 비상대책회의’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 “학교 운동부 징계이력 통합관리”

프로배구에서 촉발된 학교폭력 문제가 체육계를 강타하고 있는 가운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동부 징계이력 통합 관리 등의 관련 대책을 내놨다.

문체부는 16일 프로스포츠 선수 학교폭력 사건과 관련해 “교육부 등 관계 당국과 협의해 학교 운동부 징계이력을 통합 관리해 향후 선수 활동 과정에 반영하겠다”고 전했다. 아울러 문체부는 “대한체육회 국가대표선발규정 제5조에 따라 (성)폭력 등 인권 침해로 징계를 받은 적이 있는 경우 국가대표 선발을 제한한다”며 “향후 관련 규정 등을 통해 학교체육 폭력 예방 체계를 구축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문체부는 교육부 등 관계 기관 및 단체와 점검 회의를 개최해 발 빠르게 대책을 마련했다. 하루 전 문재인 대통령이 황희 신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폭력 등 체육분야 부조리를 근절할 특별 노력을 기울일 것을 주문한 데 따른 대응이다.

마침 19일부터 스포츠 인권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개정된 국민체육진흥법 및 시행령, 시행규칙도 이번 대책과 함께 시행된다. 국민체육진흥법은 빙상계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1차 개정돼 지난해 8월 5일부터 시행에 들어갔고, 지난해 7월 지도자와 동료의 폭언·폭행·가혹행위로 극단적 선택을 했던 고(故) 최숙현 선수 사건을 통해 2차 개정을 했다.
고개 숙인 KOVO 사무총장 신무철 한국배구연맹(KOVO) 사무총장이 지난 16일 서울 상암동 한국배구연맹에서 열린 ‘배구계 학교폭력 근절 및 예방을 위한 비상대책회의’를 마친 뒤 결과를 발표하기에 앞서 고개 숙여 학교폭력 피해자들과 배구팬들에게 사과하고 있다. 뉴스1
새로 시행되는 일명 ‘최숙현법’의 핵심 내용은 △체육인에게 인권침해·비리 즉시 신고의무 부과, 신고자·피해자 보호 조치 강화 △직권조사 권한 명시, 조사 방해·거부 시 징계 요구 등 스포츠윤리센터 조사권 강화 △가해자에 대한 제재 및 체육계 복귀 제한 강화 △상시적 인권침해 감시 확대 및 체육지도자 등에 대한 인권교육 강화 △체육계 표준계약서 도입 및 실업팀 근로감독·운영관리 강화 등이다.

문체부는 이번에 시행되는 제도와 별개로 팀 해체, 계약 거부 등으로 경력 단절 및 은퇴 위기에 처한 선수들에게 전문 조력자(에이전시)를 연계해 훈련 및 대회 참가 등 선수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도 마련한다.

◆제때 처벌 못한 학폭, '사회적 처벌' 불렀다

“그들이 일궈낸 성과는 폭력과 갑질로 이뤄낸 것이다. 더 이상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청소년들에게 ‘학교폭력을 저지르면 이렇게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

최근 방송인이나 운동선수 등 유명인들이 과거 저지른 학교폭력으로 오디션 프로그램 하차나 경기 출전 정지 처분 등의 ‘사회적 처벌’을 받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유명인의 경우 학교폭력 가해자로 지목되면 ‘여론의 심판대’에 올라 그동안 쌓아온 사회적 지위를 잃는 것이 일반적이다. 과거 청소년 시절 저지른 잘못이 거대한 부메랑이 돼 되돌아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뒤늦은 맹비난은 ‘과도한 처사’라고 비판하지만, 이 같은 사회적 처벌은 ‘정당하다’는 의견이 많다. 학교폭력 가해자는 적어도 ‘TV와 광고 등에 나오면서 인기와 부를 누리고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 학교폭력 가해자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신호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학교폭력 근절 문화 확립에 도움이 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처벌의 수준이 어디까지가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유명인이 아닌 일반인일 경우는 더욱 복잡해진다.

◆ “가해자 꼭 단죄” 공감대… 처벌수위 놓고선 논란 ‘분분’

최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학교폭력 미투’가 연달아 터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많은 사람이 사회적 처벌에 기대고 있는 것은 한편으론 가해자 처벌이나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학교폭력 사건 처리 체계를 개선하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과거에 이미 벌어진 사건들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지금 바꾼다면 10년 뒤 나올 폭로는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처벌 못 하는 사회

“현 제도는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합니다. 사회적인 처벌이 공론화돼야 합니다.” 최근 배구선수 이다영·이재영 자매의 학교폭력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이번 사태를 본 많은 이들은 사회적 처벌이 ‘정의’라고 말한다. 학교폭력은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만큼, 가해자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선수가 지핀 학교폭력 논란은 체육계를 넘어 사회 전방위적으로 번지고 있다.

17일 블라인드나 네이트판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현직 교육감 자녀, 현직 경찰관, 항공사 직원 등에 대한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20여년 전 지속적으로 따돌림과 폭력을 당했다고 쓴 사람은 “가해자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 같지만 피해를 본 사람은 평생 기억한다”며 “가해자가 평생 자숙하며 살길 바란다”고 적었다.
많은 사람이 이 같은 폭로를 지지하고 있지만, 개인정보를 공개해 가해자가 특정되는 것은 명예훼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 변호사는 “피해자의 폭로가 공익 목적이라기보다 사적인 복수로 볼 가능성이 있다면 사실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이 될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특히 일반인의 경우 학교폭력 가해자라고 해서 그가 속한 기관·회사에서 징계 등의 처벌을 받는 것이 정당하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김영미 변호사(법무법인 숭인)는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합당한 처벌이 이뤄져야 하는 것은 맞다”면서도 “판단력이 부족한 시기에 한 행동으로 성인이 된 뒤의 성과를 박탈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폭로는 ‘마지막 수단’이라는 반론도 있다. 피해자들이 과거 사건에 대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도덕적 비판’이라는 사회적 처벌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학교폭력을 폭로하는 글에는 가해자를 법적으로 처벌할 방법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 같은 비난이 마땅하다는 식의 반응이 주를 이룬다.
◆제대로 된 처벌·피해자 구제 체계 만들어야

오래전 발생한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지는 것은 바꿔말하면 과거에 사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했다는 의미다. 법 집행 기관과 교육당국 대응에 대한 불신이 표출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학교폭력은 별도의 처벌 법률이 있지 않고, 정도가 심할 경우 일반 폭행·상해 등의 혐의가 적용된다. 경미한 징계의 경우 처음에는 생활기록부에도 기록하지 않게 돼 있는 등 가해자에게 유리한 체계라는 지적이 많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교폭력위원회 등을 거치지 않고 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학교폭력 해결업체’까지 등장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학교폭력을 방지하고, 심리 상담 등 학폭 피해자를 구제할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학교폭력 예방 지원단체인 푸른나무재단의 이선영 상담팀장은 “학교폭력 폭로를 지켜보며 가장 안타까운 것은 ‘10년 전 그때’ 해결했어야 했다는 것”이라며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사건을 축소하거나 쉬쉬하지 않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회복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교육학)는 “학교폭력은 가정과 학교, 사회에도 책임이 있다”며 “실효성 떨어지는 상담 시스템을 개선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학생뿐 아니라 성인도 피해를 회복하도록 돕고, 가해학생이 건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학교폭력을 원천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지만 이번에 불거진 사례를 활용해 잠재적인 가해자와 피해자를 줄여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지우면 그만… 교묘해진 사이버 폭력에 교사들도 ‘무대책’

최근 학교폭력은 기존 신체 폭력보다 사이버폭력·언어폭력 등 관계에 기반하는 ‘관계 폭력’이 심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교육현장인 학교에는 이런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사실상 전무한 게 현실이다.

17일 교육계 관계자 등에 따르면 최근 학교폭력 양상이 기존과 다른 유형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모습이다. 물리적 가해 위주였던 과거와 달리 스마트폰 보급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용 확산 등으로 사이버폭력과 언어폭력 비중이 늘고 폭력 피해장소 역시 ‘학교 밖’ 비중이 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교육부와 교육청이 발표한 학교폭력 실태조사에서도 이 같은 변화가 드러난다. 학교폭력 중 사이버폭력 비중은 2018년 8.7%, 2019년 8.9%, 2020년 12.3%로 매년 증가했다. 폭력 피해장소 역시 학교 밖인 경우가 2019년 25.1%, 2020년 35.7%로 1년 새 10%나 늘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온라인 교육 확산으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학교폭력은 ‘사각지대’로 더 많이 숨어들어 갈 것으로 예측된다.

교사들은 이 같은 변화로 인해 공교육이 학교폭력을 포착하고 예방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수업 외에 학교폭력만 담당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경기도의 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서모(54)씨는 “최근에는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담임이 맡기보다 학생부 교사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업과 행정업무 등을 하며 학교폭력 실태 파악까지 하려니 사실 확인하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고 토로했다. 이어 “학교폭력은 점차 교묘해지는데 오프라인에 익숙한 교사들이 사이버상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조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 최모(30)씨도 “최근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교사를 무서워하지 않은 경향이 강해 교사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도 점점 줄고 있다”며 “사제 관계를 떠나 공정하게 학교폭력만 담당할 수 있는 외부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교육기관들 역시 현장의 어려움을 인지하고 있다고 답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사이버 학교폭력으로 접수된 사건 중 유튜브 등 외국 사이트에서 벌어진 경우 가해 댓글이나 게시물을 지워버리면 수사기관에서도 조사하기 어려워하는 걸로 알고 있다”며 “학교와 교사들이 접근해 조사하는 건 더 어렵기 때문에 교사들이 사이버폭력 대응에 어려움을 호소한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학교폭력 예방 프로그램에서 사이버폭력을 따로 분리해 진행하는 등 사이버폭력 대응 강화를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유지혜·이희경·이강진·서필웅·송용준·김유나·이종민·박지원 기자 kee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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