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가습기살균제 증거인멸 재판은 '세월아 네월아'?

김원진 기자 2021. 2. 20.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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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언제 올지 모르는 검찰 압수수색을 대비해야 하는 상황. 검찰 출신 임원이 법무실 직원에게 지시했다. “알다시피 지금 가습기 때도 보면 (기업) 법무(실)부터 들어온다고, 뭐든지. 그거 몰라? 로펌도 다 압수해가는 거, 요새?”

SK케미칼이 제조한 가습기 살균제 증거인멸 재판에서 공개된 녹취록의 일부다. 녹취록에는 검찰수사에 대비해 임직원들이 자료 은폐를 공모한 정황이 담겼다. 시점은 2017년 9월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월 8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만난 자리에서 SK케미칼·애경산업과 관련해 “방안을 강구하라”고 말한 직후다. SK케미칼 측은 법정에서 영업기밀 유출이 안 되도록 자료 관리를 잘하라는 취지의 발언이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2019년 4월 1일, 녹취록에 등장한 박철 전 SK케미칼 부사장(현 SK가스 부사장)을 증거인멸·증거은닉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기소에 앞서 이뤄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선 “혐의가 소명되고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검찰은 양정일 SK케미칼 법무실장(부사장)을 비롯해 임직원 5명과 SK케미칼 법인도 재판에 넘겼다. 이들은 2013년부터 태스크 포스(TF)를 꾸려 가습기 살균제 자료를 조직적으로 없애거나 숨긴 혐의를 받는다.

2019년 4월 18일 첫 공판 이후 15차례 공판이 열렸는데 결론이 나지 않았다. 본안 재판인 가습기 살균제 제조 책임(업무상 과실치사상) 1심 재판 선고가 지난 1월 12일 이뤄졌다. 증거인멸에 연루된 애경산업, 이마트 임직원들은 이미 형이 선고된 것과도 대비된다. 2019년 3월 15일 증거인멸·증거은닉 혐의로 기소된 고광현 전 애경산업 대표(징역 2년 6월) 등은 이미 2020년 4월 29일 대법원 판결까지 나왔다. 가습기 살균제 담당 직원의 노트북을 은닉하도록 한 이마트 품질 담당 임원 이모씨도 지난 1월 15일 항소심에서 징역 10개월의 원심이 유지됐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2월10일 서울 종로 SK 본사 앞에서 SK케미칼, 애경산업, 이마트 등 가습기 살균제 제조, 판매, 유통사들에 대해 피해책임 인정과 배상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수년째 이어지는 말 바꾸기

SK케미칼 증거인멸 재판이 늦춰진 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 재판을 받는 피고인만 6명이다. 법인 두 곳(SK케미칼·SK이노베이션)도 기소됐다. 증거인멸·증거은닉 등 혐의 외에 자료 미제출로 기소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 위반 사건이 병합됐다. 지난해에는 재판부가 두 달에 한 번 공판을 열기도 해 더 지연됐다. 일각에선 재판부가 판사 출신 임원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한다. 기소된 양정일 SK케미칼 법무실장(부사장)은 판사 출신이다.

SK케미칼 측의 ‘말 바꾸기’, ‘모르쇠’도 늘어지는 재판의 한 원인으로 꼽힌다. SK케미칼 측이 말 바꾸기와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증거조사 등 재판 과정이 길어졌다. 적극적인 방어권 행사를 명분으로 재판을 지연하는 전략이다.

대표 사례는 1994년 당시 이영순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의 독성실험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는 SK 측의 가습기 살균제(가습기 메이트)가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결론이 담겼다. 보고서 결과를 따르면 제품을 출시해선 안 됐다. SK케미칼은 2013년부터 6년 가까이 보고서가 없다고 주장해왔다. SK케미칼 측은 2013년 KBS 취재팀의 요청에 “자료가 있다”고 했다가 결국 보고서를 공개하지 않았다. 2016년 8월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서도 당시 김철 SK케미칼 대표는 “못 찾았다”고 했다.

2018년 1월 환경부 현장조사에서도 SK케미칼 측은 “서울대 보고서가 없다”고 했다. 2016년과 2018년 공정거래위원회의 표시광고법 위반 조사에서도 SK케미칼은 서울대 보고서를 공정위에 제출하지 않았다. 2018년 공정위 조사 과정에서 작성된 심의속기록을 보면, SK케미칼 측은 “SK케미칼은 제품(가습기 메이트)의 위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중략) 제품 개발과정에서 서울대에 의뢰해서 추가 독성 실험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SK케미칼 측은 가습기 살균제 안전성이 담보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린 보고서는 제출하지 않고, 독성 실험을 수행했다는 점만 강조했다.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도 SK케미칼 측의 말 바꾸기는 이어졌다. SK케미칼 전 연구기획팀장 A씨는 2018년 3월 검찰조사에서 “실험 보고서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2019년 1월 SK케미칼 법무팀 과장 B씨는 검찰조사에서 “실험자료는 물론 실험을 의뢰하거나 용역비를 지급했다는 등의 자료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A씨는 2019년 2월, 자료를 본인이 갖고 있었다고 검찰조사에서 말을 바꾼다. SK케미칼 측은 검찰수사 이후 “숨기려는 의도가 없었다”며 전체 보고서 56쪽 중 12쪽만 뒤늦게 제출했다.

2018년 공정거래위원회의 SK케미칼 표시광고법 위반 심의속기록. SK케미칼 측은 서울대 보고서를 근거로 들어 가습기 메이트의 인체 위해성을 알기 어려웠다고 주장했다. | 공정위


■거짓말·거짓말·거짓말

이들의 진술은 모두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김철 대표는 2019년 8월 가습기 살균제 청문회에서 “돌이켜보면 그때(2016년 국회 국회조사) 냈어야 됐다고 생각한다”며 보고서를 이미 갖고 있었음을 사실상 시인했다.

재판에서는 퇴직자 증언으로 SK케미칼의 거짓 대응이 드러났다. SK케미칼 전 직원은 증거인멸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와 “2013년 TF에서 서울대 실험 보고서는 내·외부적으로 없는 것으로 한다는 결론을 냈다. 이는 형사사건을 염두에 두고 대비한 일”이라고 증언했다. SK케미칼 측은 2019년 초 검찰수사를 받게 되자 퇴직자에게 연락해 자료 삭제를 요청한 혐의도 받는다. 퇴직자의 e메일에선 2008년 11월 SK가 애경 측에 “가습기 메이트 인체 안전성 자료는 인증받기 쉽지 않다. 인증에 수억원이 들며 5년 이상 걸린다”고 보낸 내용이 나왔다. SK가 안전성이 확인된 자료가 없는 사실을 안 유력한 정황이다.

SK케미칼 측은 법 기술적인 측면을 활용하며 재판을 지연하기도 했다. 이들은 “형사사건의 증거로 쓰일 줄 몰랐다”는 주장을 펼친다. 증거인멸죄는 타인의 형사사건이나 징계사건에 쓰일 증거를 인멸·은닉·위조할 때 적용된다. 형사사건에 쓰일 줄 몰랐으니, 자신들이 숨긴 문건 등은 ‘증거’가 아니라는 취지다. SK케미칼 측은 포렌식으로 나온 자료의 증거능력도 자주 다퉜다. 검찰 관계자는 “기소된 검사(박철)·판사(양정일) 출신들이 증거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고 했다. SK케미칼 측이 가습기 메이트를 출시해 사상자를 냈는지 다툰 재판의 1심 선고 때까지 최대한 증거인멸 재판을 지연했다는 비판도 있다. 또 다른 검찰 관계자는 “가습기 살균제 제조 책임 재판과 증거인멸 재판을 담당했던 변호인들이 긴밀하게 소통하며 재판을 진행했다. SK 측의 가습기 살균제 제조 책임을 묻는 재판이 무죄로 나오면, 관련된 증거인멸 재판의 양형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광장은 두 재판을 모두 맡았다. SK케미칼 측은 “증거인멸 재판은 회사가 아닌 개인이 대응하고 있어 드릴 말씀이 없다”고 했다.

■“정부 의지 명확해야”

SK케미칼·애경산업 가습기 살균제 무죄 판결과 관련해 전문가들의 대응도 이어지고 있다. 오지원 변호사(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사무처장)는 지난 2월 17일 열린 학술 심포지엄에서 “최근 판결을 보면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유사한 사건의 형사·민사·행정재판에서 입증 정도를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100% 단정적 과학적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국가가 기업의 무책임을 보호하는 행위와 다름없다”고 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정부를 질타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홍수종 서울아산병원 교수는 “환경부 의지가 명확해야 한다. 아직도 가습기 살균제 관련 자료 제출 접근권이 제한적”이라고 했다.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과학원은 뒤늦게 역학적 상관관계 검토위원회를 구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위원회는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질병의 역학적 상관관계를 분석·정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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