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깜둥이가 아니다! 마일스 데이비스다" 재즈 황제는 이렇게 외쳤다

조성준 2021. 2. 2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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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예술가의 사회-70] 마일스 데이비스(재즈 연주자, 1926~1991)

마일스의 대표작이자 재즈사에서 가장 중요한 앨범으로 꼽히는 `Kind of Blue`.
◆"나는 음악의 역사를 네다섯 번 바꿨다"

1987년 백악관에서 흥겨운 행사가 열렸다. 재즈 가수 레이 찰스의 업적을 축하하기 위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주최한 연회였다. 이 행사에는 레이 찰스만큼이나 유명한 재즈 트럼펫 연주자도 초대받았다. 백악관에 도착한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흑인은 거의 없었다. 그는 백악관이 구색 맞추듯 유색인종 몇 명을 초대했다고 여겼다. 흑인인 자신이 거기에 포함됐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안 좋아진 이 연주자에게 백인 여성이 말을 걸었다. "당신은 어떤 이유로 이 자리에 초대를 받았나요?" 무슨 업적을 이뤘기에 흑인이 백악관에 초대를 받았느냐는 의도가 담긴 질문이었다. 연주자는 대답했다. "나는 음악 역사를 네다섯 번 정도 바꿨습니다. 당신은 하얗게 태어난 거 빼고는 무슨 중요한 일을 했습니까?"

백인 여성에게 돌직구를 날린 트럼펫 연주자 이름은 마일스 데이비스다. 위 일화는 이 예술가의 면모를 잘 설명한다. 마일스는 예측하기 어려운 예술가였다. 그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끈질기게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떠난 음악가였다. 그래서 그는 재즈 역사를 몇 번이나 바꿨고, 재즈 황제가 됐다. 그럼에도 그는 검은 피부색 때문에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이 황제는 주눅 들기는커녕 호통쳤다. 화를 참지 않았고, 종종 폭발했다. 황제와 폭군 사이를 넘나들었다. 재즈계에서 마일스의 지위는 미술사에서 피카소와 맞먹는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마일스

재즈라는 음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엔 눈물이 있다. 미국으로 잡혀 온 흑인 노예들이 고통을 잊고자 흥얼거렸던 선율이 재즈의 원조다. 그래서 유명한 재즈 아티스트 다수가 흑인이다. 노예 집안에서 태어나 소년원에서 음악을 배운 루이 암스트롱처럼 그들 대부분은 진창 속에서 성장했다. 그런데 마일스만큼은 달랐다. 그는 1926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부농이었고, 회계사였다. 아버지는 대학까지 나온 치과의사였다. 당시 보통 흑인 가정과 달리 마일스 집안은 유복했다.

마일스는 13세 생일날 아버지에게 트럼펫을 선물로 받았다. 마일스가 음악과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밴드 활동을 하며 연주자라는 꿈을 키웠다. 졸업 후 뉴욕으로 향했다. 마일스는 줄리어드음대에 입학했다. 이 학교 학생 중 흑인은 극소수였다. 줄리어드는 클래식 음악 교육 중심지다. 마일스는 그 안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당시 클래식 음악은 백인의 전유물이었다. 백인 학생들 사이에 둘러싸인 마일스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재즈를 '흑인만의 음악'으로 여기며 깔보는 학교 분위기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일스는 뉴욕만큼은 사랑했다. 정확히는 뉴욕의 밤을 사랑했다. 밤만 되면 마일스는 흥겨운 선율을 쫓아 재즈클럽을 방문했다. 그렇게 찰리 파커라는 인물과 만났다.

마일스의 삶은 다룬 영화 `마일스`의 포스터.
◆비밥의 세계에 들어간 마일스

클래식 음악이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조가 명멸하며 발전해왔듯 재즈도 시대에 따라 다른 스타일 옷을 입고 청중을 유혹했다. 마일스가 뉴욕에 입성한 1940년대에는 비밥 재즈가 대세였다. 비밥 재즈를 이해하려면 스윙 재즈부터 알아야 한다. 조금만 시계를 과거로 돌려보자. 1930년대 미국은 경제 대공황으로 신음했다. 이 시기에 미국인들은 암울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으려 신나는 음악을 듣고 춤을 췄다. 밤만 되면 뉴욕 할렘가에 있는 클럽에 상류층 백인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재즈 밴드의 흥겨운 연주에 맞춰 무아지경으로 춤을 췄다. 연주자 대부분은 흑인이었다. 이 시기에 흥행했던 재즈가 바로 스윙이다. 스윙은 당장 춤추고 싶은 신나는 리듬을 특징으로 한다. 스윙이 미국 사회를 휩쓸었다. 그러자 백인 연주자가 우르르 재즈 세계로 입성했다. 기존 흑인 연주자들은 맥없이 자리를 내줘야 했다.

비밥은 스윙 재즈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장르다. 흑인 연주자들은 재즈가 백인 춤 잔치 배경음악 정도로 여겨지는 현실을 못마땅해했다. 그들은 재즈를 하나의 예술 장르로 끌어올리려 했다. 그렇게 비밥이 탄생했다. 비밥은 스윙의 달콤함과 가벼움을 버렸다. 이때부터 재즈는 즉흥 연주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스윙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대중음악이라면 비밥은 뚜렷한 선율조차 배제한 전위 음악이었다. 빠르고, 뜨겁고, 예측할 수 없음이 비밥의 특징이었다. 비밥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건 불가능했다. 흑인 연주자들은 백인들에게 "재즈를 넘보지 말라"고 외치듯 격렬하게 연주했다. 재즈라는 음악의 온도가 확 올라갔다. 비밥 장르를 이끈 연주자가 찰리 파커다. 찰리 파커 별명은 버드다. 그는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새처럼 자유롭게 연주했다. 재즈사에 기록된 음악가 중 찰리 파커는 연주 실력만큼은 최고로 인정받는다.

마일스는 찰리 파커를 동경했다. 그래서 무작정 그를 찾아가 재즈를 알려달라고 했다. 마일스는 줄리어드까지 자퇴하며 본격적으로 재즈 세계에 들어왔다. 1945년 19세였던 마일스는 찰리 파커 밴드 일원이 됐다.

찰리 파커(왼쪽)와 한 무대에서 연주를 하는 마일스 데이비스. 【사진 제공=위키미디어커먼스】
◆쿨 재즈로 비밥의 열기를 식혔다

최고의 밴드 안에 들어온 후에야 마일스는 자신을 직시했다. 비밥의 핵심은 거칠고 결렬한 연주 그 자체다. 연주자 개인 기량이 중요했다. 마일스 동료들은 서커스처럼 현란한 기교와 빠른 템포로 연주를 했다. 신들린 듯 악기를 다뤘다. 그러나 마일스는 그들만큼 트럼펫을 잘 불지는 못했다. 그래서 찰리 파커 밴드로 활동하면서도 좀처럼 주목받지 못했다. 우상이었던 찰리 파커와의 관계도 악화됐다. 찰리 파커는 천재 연주자였지만 한편으론 심각한 마약 중독에 시달린 피폐한 인간이었다. 그는 밴드를 엉망으로 운영했다. 밴드를 이끌어야 할 리더가 공연장에 나타나지 않기도 했다. 마일스는 1949년 우상이자 스승이었던 찰리 파커 곁을 미련 없이 떠난다. 찰리 파커는 1955년 마약 중독으로 눈을 감았다.

마일스는 비밥을 사랑했지만, 이 세계에선 찰리 파커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찰리 파커처럼 악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찰리 파커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반역을 꿈꿨다. 마일스는 스윙도, 비밥도 아닌 다른 재즈를 구상했다. 이 시기에 길 에번스라는 백인 음악가를 만났다. 길 에번스는 다른 재즈밴드에 소속된 편곡자였다. 두 사람은 자주 어울려 재즈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변화를 꿈꾸는 젊은 재즈 연주자를 모았다. 9인조 악단이 탄생했다. 그들은 1949년과 1950년에 걸쳐 몇 곡의 연주를 녹음했다. 이 곡들은 훗날 한 앨범으로 묶여 세상에 나왔다. 앨범 제목은 'Birth of Cool'이었다. 그렇게 쿨 재즈가 세상에 나왔다.

마일스는 비밥의 거칠고 현란한 멜로디를 떠났다. 그 대신 재즈에 절제된 선율과 서정적인 멜로디를 입혔다. 세상은 이 음악을 '쿨 재즈'라고 불렀다. 비밥과 쿨 재즈의 가장 큰 차이는 온도다. 비밥이 열기로 가득한 뉴욕 뒷골목 클럽 같은 음악이라면, 쿨 재즈는 손님이 모두 빠져나간 쓸쓸한 술집과 닮은 음악이다. 비밥은 뜨겁고, 쿨 재즈는 차갑다. 곧장 쿨 재즈가 인기를 얻은 건 아니다. 스윙의 달콤함도, 비밥의 뜨거움도 없었던 쿨 재즈는 밍밍했다. 특히 흑인들은 쿨 재즈에 냉담했다. 이 음악에선 백인 문화 감성이 짙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일스는 2차 세계대전 때문에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백인 작곡가에게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쿨 재즈는 뉴욕이 아닌 서부 해안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미국으로 돌아온 백인들은 잔잔한 쿨 재즈를 들으며 조용히 감상에 빠졌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백인의 선택을 받았다는 건 주류가 된다는 뜻이었다. 어느새 쿨 재즈는 비밥 열기를 완전히 꺼트렸다. 국내에서도 인기가 많은 재즈 아티스트 쳇 베이커도 마일스가 일군 쿨 재즈 영토 안에서 탄생한 스타다.

마일스가 경찰에 폭행당한 후 연행되는 장면이 실린 당시 신문 기사.
◆"나는 깜둥이가 아니라 마일스 데이비스다"

쿨 재즈 인기 덕분에 마일스는 혁신적인 재즈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마일스마저 인종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고급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피부색은 하얗지 않았다. 그가 젊은 시절 공연했던 클럽 중 상당수는 흑인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무례한 백인 청중은 이따금 흑인 연주자에게 이유 없는 야유를 보냈다. 그러면 마일스는 무대를 박차고 떠나버렸다. 1959년 뉴욕 한 클럽에서 공연하던 마일스는 휴식 시간에 밖에 나와 담배를 태웠다. 이때 백인 경찰이 다가와 "깜둥이가 왜 길거리에서 서성거리냐"며 시비를 걸었다. 마일스는 격분했다. "나는 깜둥이가 아니라 마일스 데이비스다"라고 소리쳤다. 경찰은 곤봉으로 마일스를 내려쳤다. 마치 비밥 리듬처럼 경찰은 사정없이 마일스를 때렸다. 다음날 이 사건은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마일스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는 이 사건 이후 백인 청중이 많은 무대에 올랐을 때, 종종 등을 돌린 채 연주했다.

마일스는 백인 문화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예술가다. 그러나 음악에서만큼은 아니었다. 허비 행콕, 존 콜트레인, 빌 에번스 모두 재즈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이들을 발굴해 기회를 준 사람이 마일스다. 특히 백인 피아니스트 빌 에번스를 밴드에 영입했을 때 마일스는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흑인들은 재즈만큼은 백인에게 뺏기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마일스가 백인을 기용했을 때 팬들은 강하게 반했다. 하지만 마일스는 "좋은 연주를 하는 놈이라면 피부색이 녹색이라도 상관없다"고 맞섰다.

마일스가 위대한 음악가인 이유는 쿨 재즈를 창시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이후가 중요하다. 마일스는 쿨 재즈가 백인 음악으로 굳어지는 모습을 보며 미련 없이 쿨 재즈를 떠났다. 그는 다시 비밥으로 돌아갔다. 기존 비밥에 흑인의 문화적 유산을 강화했다. 이 음악은 하드밥으로 불렸다. 이후에도 마일스는 재즈라는 세계 안에 발 딛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꾸준히 새 장르를 개척했다. 혁신가들이 그렇듯 마일스도 한곳에 머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마저 수시로 혁신해버렸다. 1960년대 록 음악이 미국을 뒤흔들었다. 재즈 입지는 확 쪼그라들었다. 마일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록과 싸우지도 않았다. 그는 재즈와 록의 결합을 시도했다. 당시엔 상상하기도 어려운 도전이었다. 1980년대에는 팝 음악이 대세였다. 마일스는 팝 가수 마이클 잭슨, 신디 로퍼 히트곡을 재즈로 변형해 연주했다. 자유로운 재즈의 선율처럼 그는 시대와 호흡했다.

마일스가 경찰에게 구타당한 1959년은 어쩌면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해였을지도 모른다. 이 시기에 'Kind of blue'라는 앨범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앨범은 재즈사뿐 아니라 음악사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반이다.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바이블과 같은 앨범이다. 앨범 첫 번째 트랙 제목은 'So, What'이다. 마일스는 이 곡의 제목처럼 살았다. 찰리 파커처럼 연주하지 못했을 때, 백인들에게 모욕받았을 때, 재즈의 인기가 식어갈 때 마일스는 이렇게 생각했을 테다. '그래서 뭐?' 그는 툴툴거리면서도 다시 트럼펫을 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영토를 향해 휘적휘적 걸었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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