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위안부 피해자 모욕' 하버드 논문, 학술 사기로 비화하나

김수형 기자 2021. 2. 20.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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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약서도 진술도 실체가 없다"…정체 드러나는 램지어 논문

하버드대학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앤드루 고든, 카터 에커트 교수가 위안부 피해자를 자발적인 매춘부로 규정한 램지어 교수의 논문에 반박문을 준비하고 있다는 건 하버드 교내 신문 크림슨을 통해 예고됐던 사안이었습니다. 이 내용이 나오자마자 입수했는데, 제목이 성명서(Statement)로 돼 있어서 처음에는 논평 정도로 생각했었습니다.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부라고 주장하는 램지어 교수와 그렇지 않다고 맞서는 역사학과 교수들의 공방으로 기사를 써야 하나 예상했었는데, 이 반박문은 내용을 자세히 보니 연구 진실성 보고서에 가까웠습니다.

교수들도 처음에는 램지어 교수가 위안부 제도가 운영됐던 일제강점기의 정치, 경제적인 맥락을 생략했다는 것에 대해서 질리도록 놀랐다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반박문을 쓰면서 주장 대 주장의 논리를 펼치기 보다는 황당한 램지어 교수 논문의 출처를 하나하나 따지는 영리한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방송 기사로 치면 인터뷰가 실제로 녹화가 돼 있던 건지 원본 테이프를 뒤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논문의 학문적 진실성이라는 우선적인 문제와 직면하게 됐다고 적었습니다. 뉴스로 치면 원본 테이프도 없이 이런 인터뷰가 있었다고 주장했던 상황을 직접 확인 작업을 거쳐 확인했던 것입니다.


램지어 교수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발적인 매춘부라고 주장하면서 논문에 계약서의 존재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이걸 추적해보니 램지어는 계약서의 실체를 한 개도 확인하지 않고 위안부와 위안소 운영자가 계약을 맺었다고 주장한 걸 밝혀낼 수 있었다고 역사학과 교수들은 말했습니다. 논문에 나오는 계약서 문건 가운데 하나는 상하이 위안소에서 일하는 바텐더의 표준 계약서였다고 확인했습니다. 위안부 계약서는 아니었던 겁니다. 교수들은 어떻게 실물을 보지도 않고 램지어는 그렇게 극단적으로 강한 주장을 할 수 있었는지 납득이 안 갔다고 기술했습니다.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그런 문건에 대한 3자의 구두, 서면 진술이라도 있어야 하겠지만, 이마저도 전무했습니다. 미얀마의 한국인 위안부 계약서 주장은 전쟁 전 것이었고, 그나마도 표본 양식에 불과했습니다. 딱 한 가지 검증할 수 있는 3자의 진술이 미얀마와 싱가포르에서 위안소 접수 담당자가 기록한 수첩이었는데, 이것도 수첩 자체가 아니라 수첩에 대해 언급한 책이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학술 논문의 진실성에 대한 지독한(egregious) 위반이라고 비난하면서 다른 학자들이 추가로 논문의 오류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고 있다는 예고까지 덧붙였습니다. 두 교수는 학술지가 이 논문에 대한 전문가 조사 결과를 기다려 게재를 철회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일련의 사태는 트럼프 대통령의 부정 선거 주장을 연상시킵니다. 트럼프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선거 부정이 벌어져 대선을 도둑맞았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에서 증거 능력을 사실상 전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뭐가 실체가 있어야 법원도 재판을 열어 공방이라도 했을 텐데 처음부터 끝까지 음모론이니 더 얘기할 가치조차 없었던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역사학 교수들도 뭔가 공방을 할 각오를 했겠지만, 뜻밖에 게임이 열리지도 못하고 램지어 교수는 실격 처리 위기에 처한 겁니다.

● "게임 이론은 거짓말 위한 것 아니다"…무너지는 이론 토대

램지어 교수는 게임 이론에 따라 매춘부와 위안소 운영자가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해 계약을 체결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선급을 챙기려는 매춘부, 일을 열심히 시키려는 포주가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율하기 위해 계약을 맺었다는 논리의 기초로 게임 이론을 활용했습니다. 그 결과 매춘부들은 거액의 선급금을 받고 1,2년 정도 계약을 했고, 포주들은 돈을 충분히 많이 벌어주면 조기 귀향할 수 있도록 해줬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이론적인 토대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UCLA에서 게임 이론을 가르치는 마이클 최 교수를 섭외했습니다. 마이클 최 교수는 게임 이론에 대한 책<Jane Austen, Game Theorist> 등을 저술하며, 게임 이론에 대해서는 미국 내 권위자로 통하는 인물입니다.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들은 이 논리 전개를 어떻게 볼지 궁금했는데, 최 교수 인터뷰는 뜻밖에 간단했습니다. 게임 이론이든 게임 이론 할아버지든 거짓말을 설명하는데 이런 이론을 동원할 수는 없다는 명쾌한 설명이었습니다.


최 교수는 게임 이론 자체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불과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자동차 수리공과 자동차 소유주의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율할 것이냐 같은 문제를 게임 이론에 따라 설명할 수는 있지만, 거짓말을 게임 이론으로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최 교수는 램지어 교수가 게임 이론을 들먹인 것에 대해서 전문가로서 분노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최 교수는 램지어 교수가 소가 짖을 수 있다고 우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했습니다. 게다가 매춘부와 포주 사이 이해관계 조정을 그 논리로 풀어낸 거는 게임 이론의 극히 작은 부분만 떼서 논리 전개를 한 거라고 말했습니다.

● '한국인 극혐' 드러낸 램지어의 하버드 토론 자료

램지어 교수의 하버드 토론 자료(Discussion Paper)라고 이름 붙여진 논문 초안집에서 한국 관련한 내용을 뒤져보면 매우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인 비하, 한국인 혐오 등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논문을 읽다가 보면 이게 학술 논문인지 일본 극우 인사의 혐한 칼럼인지 헷갈릴 정도였습니다. 이런 내용을 하버드의 이름이 걸려 있는 토론 자료에 담아 버젓이 온라인에 게재했다는 사실이 더 경악스러웠습니다.

<Social Capital and the Problem of Opportunistic Leadership: The Example of Koreans in Japan>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뉴욕특파원과 같이 검토해봤는데, 역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 한국인들을 거론하면서 비위생적이고 시끄럽고 싸움을 많이 해 일본인들이 기피했다고 기술해놨습니다. 일본인이 재일교포를 차별하는 것은 재일교포 탓이라는 주장을 담았는데, 일본 극우 인사들도 이런 과감한 논리 전개를 하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한국 근현대사를 설명하면서 테러리즘 단락을 만들어서 상하이 임시정부의 항일 독립군이 테러리스트와 파괴 공작부대(saboteur squads)로 나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30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에 학문을 가장한 한국인에 대한 공격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역사학계의 시각을 듣고 싶어서 스탠퍼드대학 역사학과의 문유미 교수에게 문제의 논문을 보내주고 검토를 부탁했습니다. 문 교수도 처음 보는 논문이라며 한번 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얼마 안 지나서 급하게 먼저 전화를 줬습니다. 논문을 읽다가 너무 놀라고 황당해서 자신도 메모를 했는데 너무 많아서 어디서 어떻게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고 표현했습니다.


문 교수는 간토대지진에서 학살당한 한국인들을 언급하면서 제주4·3사건을 꺼내며 한국 정부는 더 많은 한국인들을 살해하지 않았냐고 언급한 것에 분노를 표시했습니다. 일본에 귀화한 사람들은 그나마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남아 있는 재일교포는 질이 안 좋은 사람이라는 설명은 일본은 선, 한국은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담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게다가 소수 집단에서 지도세력은 기회주의적으로 그 집단을 착취한다고 기술해 재일교포들의 히스토리를 완전히 폭력적으로 재구성했다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문 교수는 한마디로 이 논문 자체가 재일교포 사회에 대한 엄청난 폭력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램지어 교수가 조선인을 딱 떼서 범죄율이 높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식민시대의 인종적인 차별에 대한 맥락을 전부 배제하고 조선인은 폭력적이고 범죄를 저지른다는 기술은 학자로서의 양식을 의심하게 만들었다고 문 교수는 말했습니다. 이토론 자료가 논문으로 나온다면 이번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논문과 비슷한 학계의 스캔들이 또 다시 일어나게 될 거라고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 학계에서 부정 당하는 논문…램지어의 깊은 침묵

이번 사태를 보면서 위안부 인권에 대해 미국 학계에 건전한 자정 작용이 작동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문제가 된 논문에 대해서 여러 학자가 발 벗고 나서서 실체가 무엇인지 시간과 노력을 들여 팩트체크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논문의 출처를 학자들이 일일이 뒤져서 따져본 것은 학자적인 전문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강압과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까지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 것은 큰 소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램지어 교수가 일본 극우세력의 개념을 무리하게 들여와 논문 기록으로 남기려는 과잉 서비스를 하려다 본전도 못 찾은 상황이 됐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미국 주류 언론들은 이번 사안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산발적으로 기사가 일부 나면서 미국 매체들의 주목도도 높아지는 상황입니다. (소수자의 인권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이는 미국 매체들이 이번 사안에 대해서 침묵하는 이유에 대해서 솔직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논문 사태가 학계 내부의 더 큰 스캔들로 번진다면 그때도 침묵을 이어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제 램지어 교수가 답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해당 학술지는 출간 이후 학계에서 신뢰할 만한 우려가 제기되면 당사자의 소명을 듣는다고 공지한 바 있습니다. 램지어 교수는 사태 초기에는 이메일을 보내면 인터뷰를 사양한다는 짧은 답을 주기는 했는데, 이제는 반응을 아예 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다만 하버드 교내 잡지 크림슨에 답한 걸 보면 자신의 논문에 대해서 입장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논문을 자진 철회하는 것 자체가 학자로서는 매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램지어 교수의 우군은 미국 학계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보수 성향의 산케이신문의 해외 선전지인 재팬포워드에 위안부 피해자 비하를 일삼는 극우 일본 학자들이 거의 유일한데 이들은 램지어를 구해줄 수 있을만한 참신한 논리가 거의 없는 게 문제입니다. 램지어의 반론에 깜짝 카드가 남아 있는지 보는 게 마지막 관전 포인트로 보입니다. 지금 상황이라면 논문 철회는 물론 학술 사기라는 비난을 피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김수형 기자sea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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