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 부르짖던 사이비 교주
성경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믿음은 인류 발전의 주요한 원동력이었다. 신을 향한 신앙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고, 자신이 옳다는 신념은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그릇된 믿음이 불행의 씨앗”이라고 말하기도 하지.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믿음은 차라리 덜 위험할 수 있어. 금세 사람들 사이에서 고립될 테니까. 그러나 아름답고 건전해 보이던 믿음이 변질해 급기야 끔찍한 범죄의 모태가 될 때, 우리는 ‘믿음’의 양면성에 경악하게 되지.
코로나19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는 가운데 나온 어느 흑인의 말은 무척 서글펐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흑인들은 (강도로 오인돼) 총을 맞기 십상이다.” 노예해방 이후 1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인종차별의 벽은 저렇게 굳건한가, 탄식이 절로 나왔다. 물론 그 장구한 시간 동안 인간에 대한 차별은 부당하다는 믿음으로 인종차별과 싸운 사람도 많았지. 짐 존스(1931~1978)도 그중 하나였어.
짐 존스는 주정뱅이 아버지에게 학대받으며 외톨이로 자랐지만 인종차별 단체에서 활동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차별받는 흑인의 처지에 분노하는 공감력 높은 소년이었지. 흑인 친구를 집에 데려왔다가 아버지와는 말도 안 섞는 사이가 됐고, 부모가 이혼하자 어머니를 택하기도 했어. 존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가르치는 사회주의 이념을 기독교와 결합시킨다. “극적인 사회변혁은 오로지 종교를 통해서 인민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지. 감리교회의 청년부 전도사가 된 그는 인종 분리가 만연했던 기독교계에서 용감하게 인종 통합 예배를 주장하며 “흑인 형제들이 예배당 맨 앞에 앉아 있어야 한다!”라고 부르짖는 등 논란의 주인공으로 떠올라.
이후 짐 존스의 인생 두 축은 인종 통합과 사회주의였다고 할 수 있을 거야.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에 더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갖는다는 사실이 역겹게 느껴졌다. 어쨌건 나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반자본주의 정서가 그를 지배했다. 그는 점차 기존 기독교계에서 이탈해 1955년 인민사원(Peoples Temple)이라는 독자적인 공동체를 건설했어. “빈민층, 흑인을 포함한 소수인종, 약물중독자, 창녀, 노숙자, 소외된 노인 등을 상대로 펼친 전도 사업과 자선사업으로 명성을 얻었다. (···) 짐 존스는 특유의 정치력을 발휘하며 적극적인 사회봉사 활동에 역점을 둔 결과 소외계층을 위한 급식소, 진료소, 병원, 상담소, 양로원, 탁아소 등을 설치 운영하였다. 또한 인민사원의 엘리트들은 신도들의 법적 문제까지 나서서 해결해주었다(이병욱, 〈짐 존스의 정신병리〉).”
“새로운 사회, 근대적인 천국” 만들자
“흑인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영원히 지옥에서 불탈 것이다!”라고 외치는 짐 존스의 열변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고 스스로 인민사원의 일원이 되었어. 특히 유색인종들의 참여는 두드러졌다. 또 인종차별 철폐에 공감하는 사람들로부터도 큰 지지를 받았지. 이를테면 미국 제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의 부인 로절린 여사는 짐 존스의 유력한 지지자였어. 급기야 1976년 짐 존스는 인종차별 철폐에 기여한 공로로 ‘마틴 루서 킹 상’을 받는 영광까지도 누린다. 그러나 짐 존스는 그런 명예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었단다.
그는 “여러분이 나를 아버지로 본다면 나는 아버지가 없는 분들을 위한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를 당신의 구주로 본다면 나는 당신의 구주가 될 것입니다”라고 외치며, 모범적인 지도자가 아닌 과대망상에 시달리는 사이비 교주가 되어 있었어. “핵폭발로 인류가 멸망할 것이고 나를 따라야 산다!” 마약 복용 등 사생활 문제와 인민사원 내부 폭력에 대한 고발이 이어지자, 짐 존스는 이를 실천으로 극복하는 대신 비판으로부터 고립되는 길을 택한다. “새로운 사회, 사회주의적 예루살렘, 근대적인 천국”을 만들자면서 인민사원 구성원들과 함께 남미 가이아나의 열대우림 속으로 집단 이주해버린 거야.
짐 존스의 교리를 굳게 믿는 사람도 많았다. ‘존스타운’에서 행복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 그러나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은 배겨내기 어려웠어. 이들의 고발과 폭로가 이어지면서 미국 하원의원 리오 라이언은 가이아나 인민사원에 대한 현지 조사를 감행하게 돼. 이 조사 과정에서 인민사원을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라이언 의원이 그들을 데리고 떠나려던 찰나, 인민사원 측 무장경비대가 총격을 퍼부어 라이언 의원을 포함해 5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어.
이 소식을 들은 짐 존스는 인민사원 신도 전원을 불러 모은다. 이전부터 그는 자신의 신도들에게 자살 ‘연습’을 시켜왔어. 신경안정제를 탄 음료수를 나눠주며 ‘이걸 마시면 새로운 별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이라는 식이었지. 이런 자살 연습을 그는 1978년 한 해에만 43번이나 했다고 해. “당신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 살아서 믿는 자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부르짖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든 것이 진짜였지. 1978년 11월18일 무려 900명이 넘는 인민사원 신도들이 독약을 먹고, 또는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으나 짐 존스도 총탄에 사망했단다. 이것이 당시 세계를 뒤흔들었던 ‘인민사원 집단자살 사건’이야.
현장에 있지 않아 살아남았던 인민사원의 일원 로라 존스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모든 인종과 배경, 사회경제적 수준을 아우르는 환상적인 공동체를 보았다. 그들은 1000명의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 만드는 일을 정말 훌륭하게 해냈다. (···) 내 평생 알았던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가장 헌신했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BBC, 2018년 12월2일).”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남의 희생을 짓밟는 이기적인 삶에 대해 저항했던 건전한 시민들이었단다.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지만 〈야고보서〉 2장 14절은 이렇게도 가르치고 있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인간의 믿음은 산을 능히 옮길 수 있다. 하지만 그 산을 자기 머리 위에 떨어뜨릴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지. ‘행함’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아빠는 그중의 하나가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옳다는 믿음은 소중하지만 방향과 내용에 대해 항상 돌아보고, 자신의 ‘행함’이 유익한지 해로운지 가늠해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야. 그렇지 못할 때 믿음은 곧잘 악마의 도구가 된다. 이상촌을 건설하려던 인민사원의 ‘훌륭한 사람들’이 그러한 성찰을 게을리한 탓에 짐 존스라는 범죄자의 피해자이자 공범으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김형민 (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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