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백기완 선생을 추억하다

정용인 기자 2021. 2. 2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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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8년, 일흔여섯 살의 백기완 선생이 부당해고에 맞선 기륭전자 해고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을 방문했다. / 정택용·백기완 장례위원회 제공


당황했다. 백 선생께 물은 것이 아닌데 마이크를 건네 달라고 하더니 기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면서 말을 이었다.

“경향이 힘차게 글을 써줘서 고맙기는 한데 내가 말한 대로 쓸 거야?”

그러겠다고 답했다. 백기완 선생은 “어긋나면 가만 안 둬”라면서 말을 이었다.

2017년 8월 17일의 일이다. 기자회견의 주체는 ‘세상을 걱정하는 재야사람들’이었다.

며칠 전 새벽 백기완 명의의 행사 알림 문자를 받았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사이의 긴장이 한층 높아가는 상황이었다. 관련 기사도 기획했던 차라 기자회견 자리에 참석했다.

당시 기사에서 백기완 선생의 말을 인용했지만, 전문을 다 옮겨 적지 못했다.

말한 대로 쓰겠다는 약속을 4년이 지난 이제야 지킨다.

“1962년 장준하 선생이 하는 사상계에 웬 젊은이들이 와서 물어봤어. 여러분을 뭐라 하면 좋겠냐고. 한 기자가 여러분을 하나로 일러 뭐라고 말하면 좋겠냐고 물은 거지. ‘통칭이라는 말 아니겠냐’고 하니 통칭 맞습니다, 그 말 맞는데…. 그 기자가 또다시 여러분을 통틀어 말하는 통칭을 뭐라 해야 하냐는 거야. 그래서 내가 ‘조야(朝野)는 권력 주변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들은 권력 관계가 없으니 들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재야(在野)가 어떻겠냐’고 말했어. 장준하·함석헌 같은 사람들을 부를 때 재야로 하자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야. 그날 나는 배고파서 술 얻어먹으러 갔어. 그런데 그 말이 좋다고 해서 며칠 있다가 재야, 그러니까 사실상 들에서 큰소리를 치고, 들에서 부정부패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 어른들을 통칭하는 이야기로 ‘재야’라고 한다고 기사가 난 거야. 최소한 70년 가깝죠. 여기에 모인 사람들. 권력과 관련 없고, 들에서 부정부패 맞서 싸우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모여 뭐하겠냐고. 앞으로 기자회견만 하지 않겠다. 촛불 들고 박근혜를 청와대에서 끌어내고, 촛불 횃불을 들고 길거리에 나서겠다. 어때 괜찮아? 꼭 써줘야 해!”

당시 기사에서는 백 선생의 마지막 말만 인용했다.

백기완 선생이 앞에서 언급한 것은 재야라는 말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비화(秘話)를 설명한 것이다.

■ ‘재야’라는 말이 탄생하게 된 배경

그러나 백기완 선생이 재야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이듬해인 1963년 1월 백 선생은 6개의 4·19단체를 대표하는 야당 ‘자유대중당’을 만들어 창당준비위원장을 맡는다.

그해 5월 경향신문에 ‘백기완 자유대중당 창당준비위원장’ 명의로 발표한 ‘민정이양과 새정치풍토’라는 국한문 혼용 글은 익숙한 백 선생 특유의 글투가 아니다. 민주주의 파괴의 장본인으로 ‘한국적 보수주의’를 지목하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이 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대한민국의 보수정객에는 전혀 매력이 없다는 다섯 번째의 지적이다.

“「히어로」가 소멸된 현대이지만 역시 정객은 어떤 강자로서의 강렬한 매력과 성격을 발산하고 있어야 한다.”

“누가 대신할지 참. 내가 보기엔 쉽지 않아요. 독보적인 겁니다. 학연으로, 지연으로 이런 것도 아니고.”

기자회견장에서 백 선생이 말하던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 사무실을 드나들던 웬 젊은이들’ 중 하나였던 이부영 민주평화복지포럼 상임대표(79)의 말이다.

“그 양반이야말로 학교를 변변히 다닌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시대과제에 대해서는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보통사람들은 대부분 어느 대학이다, 고등학교다, 그런 걸 끝내고서도 하다못해 대학교수다, 언론인이다 이렇게 거치면서 되잖아요. 저 양반은 완전히 자기 몸으로 부닥쳐서 어쭙잖게 배웠다는 사람들보다 더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서정적인 글도 써내고, 연설은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하고, 항상 머리가 뒤떨어져 있지 않은 거예요. 그렇다고 빨갱이로 몰릴 정도로 극좌는 아니면서도 굉장히 진보적인 생각을 하고, 현실에서 동떨어지지 않는 진보적인 실천과 말을 해온 사람이니….”

이 대표는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시위할 때부터 몹시 추운 날씨인데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그랬으니 건강이 나빠지신 것”이라며 “백기완 선생은 누가 말한다고 듣지 않고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분”이라고 추모했다.

이부영 대표와 대학 과 동기(서울대 정치학과 61학번)로 백 선생과 어울렸던 송철원 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은 “따지고 보면 우리보다 10년은 나이가 많은 형님뻘인데, 정당을 만들었으니 ‘백당수’, 또 나중에 출마하기도 하는데 돈이 없어서 도끼를 들고 야당 재정부장 집 담을 넘어 정치자금 내놔라고 했다고 ‘백도끼’라는 별명도 우리끼리로는 우스갯소리로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같이 술을 많이 마셨는데 우리가 형무소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 사실 할말이 없는 거라. 백 선생이야 형무소 제대로 간 것은 YWCA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전두환 때가 처음이었거든요. 그때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씩씩대고 있다가 진짜 엄청나게 당했지. 손톱 뽑히고 걷지도 못할 정도로. 그래서 이 양반이 ‘나도 한번 간다’고 했는데 제대로 갔다 온 거지.”

2월 17일 찾은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 대문에 조문객이 국화를 꽂아놓았다. / 정용인 기자


■ 유고시를 읽으며 울먹이던 ‘老투사’

“진관동 기자촌 집을 아침에 나서면 항상 여기에 먼저 들렀습니다. 쓰러져서 입원하기 전까지요.”

대학로 길가 2층 학림다방 이충열 대표(66)의 말이다.

창가 자리 백 선생이 항상 머무르던 ‘예약석’에는 어느 손님이 가져다 놓은 국화 한송이가 놓여 있었다.

한달에 한 번씩 이 대표와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신학철 화가 등과 함께 점심 냉면모임을 열 때 출발지도 학림다방이었다.

“이북 황해도가 고향인 백 선생이 좋아하는 것은 아무래도 평양냉면이었다”고 이 대표는 회상했다.

백 선생과 마지막 모임은 지인들과 지난해 여름 강원도 바닷가에 바람 쐬러 간 일이었다.

“백 선생님이 오시면 대기하고 있다가 베토벤 ‘운명교향곡’을 틀곤 했어요. 그다음에는 한국가곡을 틀었고…. 고관절이 부러져 이동하기 힘들 때는 제가 업고 올라오곤 했는데.”

백 선생과 관련해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들려달라는 요청에 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이사장은

“부고를 접하고 맨 처음 생각났던 것은 5년 전쯤 회의를 하는데 전화해서는 대뜸 우시던 일”이라고 말했다.

“내 동생 박래전 유고시집에 ‘어머님 말씀’이라는 시가 있어요. 내가 감옥에 가서 유치장에서 구류 살 때 이야기를 동생이 시로 쓴 것인데, 선생님이 전화기 너머로 읽으시면서 우시는 거야. 어머님이 자식을 감옥에 두고 연로한데, 이 시집이 생각나서 읽다가 울었다는 건데….”

백 선생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투쟁을 하면서 엄청 센 발언을 한다는 이미지인데, 투사의 이면에 정말 울보 같은 그런 면이 있었던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학림다방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밝은 해도/ 캄캄한 밤을/ 하얗게 지새야/ 새벽을 맞이하나니/ 벗이여/ 오늘도 질척이는 벗이여”

글을 남긴 ‘지나던 이’ 역시 고 백기완 선생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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