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토익시험, 접수부터 '전쟁'.. 고사장 부족에 '원정'도 [심층기획]
코로나에 외환위기 후 최대 고용한파
1월 취업자 1년전比 98만명 줄어
공인중개사 시험 응시생 29%가 30대
감염 우려에 고사장 수용 인원 축소
"시험 응시, 아이돌 공연 티케팅 방불"
"취업준비 방식 바뀌도록 인턴 늘려야"
경북 경산시 한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한 취업준비생 유모(29)씨의 푸념이다. 그는 “기업에서 학력과 자격증보다 실무경험을 본다고 하는데 요즘 인턴 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면서 “해를 거듭할수록 취업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아 우울하다”고 푸념했다.
요즘 유씨는 자격증 공부에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의 일과는 오전 9시쯤 독서실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오후 3시까지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오후 9시까지는 토익공부에 전념하고 있다. 점심과 저녁 식사시간을 제외하곤 온종일 자격증시험에 힘을 쏟는 셈이다. 그는 지난해 말 토익시험에서 910점의 고득점을 받았다. 하지만 바늘구멍처럼 좁디좁은 취업시장을 뚫고자 토익 공부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만점(990점)에 가까운 점수를 얻기 위해서다. 유씨는 일명 ‘토익 족집게’로 불리는 강사에게 매월 30만원을 내고 강의까지 받는다.
코로나19가 1차 유행하던 지난 4월. 대구의 한 제조업체에서 사무업무를 보던 임수민(31·여)씨는 5년간 몸담은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19에 따른 매출 부진으로 구조조정당한 것이다. 사정을 모르지 않기에 마냥 회사를 탓할 수만도 없었다. 적은 금액이지만 꾸준히 적금을 넣으며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던 임씨의 삶은 그때부터 어그러졌다.
임씨는 “구직사이트를 보고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가며 면접을 봤지만 백조(젊은 여성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했다”면서 “요즘은 구직활동 대신 부모님이 공인중개사 시험을 권유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혹독한 고용한파는 지표가 보여준다. 15일 통계청의 ‘1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전체 취업자는 2581만8000명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98만2000명 줄었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 12월(-128만3000명) 이후 최대 감소폭이다. 취업자는 코로나19가 확산한 지난해 3월부터 11개월 연속 감소세다. 연령대별로는 청년층(15∼29세) 취업자가 31만4000명 줄어 감소폭이 가장 컸다. 60세 이상(-1만5000명)도 2010년 2월(-4만명) 이후 처음 감소하면서 모든 연령층에서 취업자가 줄었다. 반면 실업자는 157만명으로 오히려 41만7000명 늘었다. 실업자 규모는 1999년 6월 통계작성 이후 최대 규모다.
이런 결과를 반영하듯 요즘 자격증시험 응시 경쟁은 치열하다 못해 전투적이다. 취업준비생들은 요즘 자격증시험 응시를 아이돌 공연 티케팅과 대학 인기과목 수강신청에 빗대 표현했다. 그만큼 신청이 어렵다는 뜻이다.
‘중년고시’로 불리던 공인중개사 시험은 이제 옛말이 됐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공인중개사 시험에 응시한 인원은 모두 34만3076명이다. 지난해보다 5만여명이 늘어 1983년 공인중개사 제도가 도입된 이후 가장 많은 응시생이 몰렸다. 눈에 띄는 점은 연령대별 응시생 수다. 40대가 32%로 가장 많았고 이어 30대가 29%를 차지했다. 응시생 10명 중 6명이 30·40대인 셈인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올해는 아예 취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이들도 많다. 내년 취업을 목표로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좀 더 스펙을 쌓겠단 것이다. 정모(26)씨는 “내년은 올해보다 상황이 나아질 거라 기대하고 있다”면서 “올해는 대학원에 진학해 시간을 좀 더 쓸모 있게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 취업을 준비 중인 이성혁(30)씨는 지난주부터 또다시 토익 책을 폈다. 이씨는 2년 전 목표하던 토익 점수를 받았다.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입소문 난 학원에 다니며 오로지 토익 공부에만 매진한 결과다. 그는 한국어능력시험 2급도 어렵사리 취득했지만 취업에서 잇단 낙방의 고배를 마시면서 다시 자격증시험을 공부 중이다. 2년으로 한정된 2종의 자격증 인증 유효기간이 곧 만료되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들어 ‘무전무업(無錢無業)’을 실감한다”면서 “자격시험 재응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다”고 했다. ‘무전무업’은 취업준비생들이 만들어 낸 신조어다. ‘돈이 없으면 취업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고용절벽에 선 취업준비생들이 자격증 재취득 문제로 시름이 깊다. 자격증 시험의 인증기간이 약속이라도 한 듯 대부분 2년으로 고정돼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자격증시험 인증기간을 둘러싼 취업준비생들의 볼멘소리는 어제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다. 비싼 시험 응시료와 2년으로 한정된 인증기간은 취업준비생의 대표적인 불만으로 꼽혀왔다. 이 때문에 코로나19가 확산한 올해만이라도 인증기간을 늘려달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취업준비생은 취업이란 심리적 부담감과 금전적 어려움으로 ‘이중고’를 호소한다. 이소은(25·여)씨는 “언제까지 부모님 손만 빌릴 수 없어 설 명절 내내 대형마트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한 달 학원비도 벌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여기에 일반적인 자격시험은 2년이 지나면 시험 출제 방향이 대폭 바뀐다. 이 때문에 구직기간이 길어진 취업준비생은 다시 학원에 등록하고 새 책도 여러 권 사야 한다. 더구나 대부분은 시험 한 번에 원하는 점수나 등급을 받기 어렵다. 대표적인 자격시험인 토익의 응시료는 4만4500원으로 취업준비생 입장에서 작지 않은 부담이다.
자격시험 주관사는 구직자의 실력 하락 가능성을 고려해 2년의 유효기간을 두고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수익성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효은(29·여)씨는 “유효기간은 주관사가 늘리거나 줄일 수 있다”면서 “수익성 때문에 짧은 인정기간을 두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승현(30)씨는 “공공기관과 달리 여전히 영어 성적에 제한을 두는 사기업이 많다”면서 “인증기간을 늘릴 수 없다면 형편이 어려운 취업준비생에게는 정부가 시험 응시료 일부를 지원해주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안동=배소영 기자 sos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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