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분쟁지역] "소수민족을 분열 시켜라".. 또 '이간 정책' 카드 꺼내든 미얀마 쿠데타 군부
미얀마 쿠데타가 발발한 지 정확히 2주가 지난 14일 미얀마 최대 소수민족 카렌족 진영에서 중요한 성명이 나왔다. 카렌여성기구(KWO)를 비롯해 카렌족 85개 시민사회단체 명의로 발표된 성명은 “카렌 무장단체들이 쿠데타 군부와 어떤 협력도 해선 안 된다”고 쐐기를 박았다. 사흘 전 쿠데타에 모호한 입장을 보이던 무장단체들을 향해 단결을 호소한 성명에 이어 두 번째였다.
성명의 요점은 크게 네 가지다. 우선 2008년 제정된 군정 헌법을 무효화할 것, 둘째 2011년 미얀마 개방 후 진행된 소위 ‘민주화 과정’을 전면 재검토할 것, 셋째 연방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 붙인 소수민족과의 ‘평화협상 프로세스’를 다시 들여다 볼 것, 마지막으로 2015년 10월 15일, 10개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이 서명한 ‘전국휴전(NCA)’을 무효화하라는 주장이었다.
NCA 서명 당사자이자 카렌족 대표 반군조직인 카렌민족연합(KNU)도 이날 입장문을 내고 “우리는 소수민족들의 비폭력 시위를 지지하며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또 같은 날 카렌어 유투브 채널 KPTV는 “KNLA(카렌민족해방군ㆍKNU 군사국) 본부가 시민 보호를 위해 모든 카렌 무장조직들에 전시에 준하는 준비태세를 명령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학생 반군 출신으로 KNLA 5여단 지역(미얀마ㆍ태국 국경)에서 활동 중인 A씨는 기자에게 “준비를 잘하고 있으며, (KNLA) 타격조와 상의 중”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여기서 ‘준비’란 말은 “미얀마 군부의 쿠테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도심 게릴라전이 가능한 이들을 모집해 훈련하고 있다”던 3년 전 그의 말을 재확인시켜준 것이다.
세계 최장기(72년) 내전 당사자인 KNU는 미얀마 소수민족 안에서도 상징성과 무게감이 남다르다. KNLA 3여단 지역인 클러르위투와 5여단 지역 무트로 등에서는 휴전 상황이 무색하듯, 지난달에도 정부군의 공격이 계속됐다. 카렌 인권단체들은 이들 지역 공격으로 약 5,000명의 난민이 정글로 대피했다고 전했다. 이미 지난해 12월부터 무트로에서 시작된 정부군과의 충돌로 장기간 유지되던 휴전엔 금이 가기 시작했고, 이번 쿠데타는 휴전 사문화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
미얀마 군의 쿠데타 신호는 지난해 11월 총선 투표 전 준비상태를 트집잡고, 투표 후에는 부정의혹을 고집하는 행태에서 일찌감치 감지됐다. 소수민족과의 평화협상 과정에서도 군부의 반란 움직임이 엿보였다. 총선 직후 군은 평화협상위원회(PTC)를 구성,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의 협상 창구인 ‘민족화해와 평화센터’를 무시하는 행보를 보였다. PTC는 올해 1월 말까지로 예정됐던 전국 휴전 기간을 이달 28일까지 한 달 연장했다. 쿠데타 감행과 쿠데타 직후 개편을 위해 시간을 벌려 했던 게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최근 쿠데타에 저항하는 미얀마 시민들을 무력 진압하기 시작한 군은 따지고 보면 독립 직후부터 ‘버마(당시 국호) 연방’ 내에서 자국민을 상대로 한 학대 행위를 멈춰본 적이 없다. 심리전과 분열 책동에도 능하다. 이번 쿠데타의 최고통치 기구로 알려진 ‘국가행정평의회(SAC)’는 현재 일부 소수민족 정치인과 정당에 미끼를 던지는 중이다. 앞서 카렌시민단체들의 잇단 성명은 분열 작전이 소수민족 사회에 깊이 스며드는 걸 조기에 차단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흥미롭게도 분열과 혼선이 가장 두드러진 지역은 로힝야족 집단학살의 현장인 서부 라카인주(州)다. 미얀마 군부는 쿠데타 발생 이틀 후인 3일, 라카인주 7개 타운십에 인터넷 통신을 복원했다. 2018년 말부터 정부군과 라카인족 무장 반군 ‘아라칸군(AA)’ 간 내전이 고조되면서 수치 정부가 끊어놓은 인터넷을 신(新)군정이 594일 만에 재개통한 것이다. 게다가 집권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정부는 지난해 총선 당시 라카인주 17개 타운십을 투표 예외 지역으로 선포한 뒤 투표권을 박탈한 바 있다. 당연히 NLD 정부에 대한 라카인 커뮤니티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민간정부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군부가 이런 틈새를 파고드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종족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일부 라카인족 정당들엔 중앙정부의 주인이 누가되느냐는 큰 의미가 없다. 미얀마 군부는 바로 그 지점을 노리고 있다. 3일 군부가 라카인주 최대정당인 아라칸민족당(ANP) 대변인, 도 에누세인을 신군정 통치기구 SAC 멤버로 영입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에누세인은 2012년 반(反)로힝야 무슬림 증오 캠페인에 불을 지핀 주범으로 로힝야 학살 책임이 있는 라카인민족개발당(RNDP)에 속했던 정치인이다. 그는 2013년 8월 기자와 인터뷰에서 로힝야 시민권 이슈를 묻는 질문에 “벵갈리(로힝야족을 낮춰 부르는 용어)는 불법 이민자들이고 우리 땅을 빼앗으려는 종족”이라며 강경 입장을 취했다. 에누세인이 SAC에 들어간 다음날 이번에는 ANP의 성명이 나왔다. “신군정과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게 핵심이다. ANP가 주정부 구성을 당의 최고 목표로 삼는 만큼 군부와 물밑 거래를 했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쿠데타 군부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은 RNDP 창당 대표였던 에 마웅이다. 2012년 반로힝야 정서 확산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당사자다. 마웅은 ANP 대표를 지내다 2017년 당내 정파 분쟁으로 아라칸전선당(AFP)으로 분당했다. 2018년 수치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2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그는 12일 군부의 사면 조치를 통해 전격 석방됐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AFP는 일단 신군정의 SAC 참여 제안을 완곡히 거절했다. 그러나 마웅은 풀려난 직후 라카인주 지역 매체인 ‘개발미디어그룹’ 인터뷰에서 자신을 사면해준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아라칸시민단체네트워크(ACN) 47개 시민단체도 공동 성명을 내고 “ANP가 쿠데타 군인들과 협력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ACN 총괄을 맡고 있는 도 에 므랏 초는 “시민들을 억압하는 독재에 협조하는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지지기반의 반대 여론을 의식한 듯 ANP와 에누세인 대변인은 SAC 참여 여부를 놓고 12~14일 당 차원에서 재논의하겠다며 한 발 물렀다.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라카인 정치인들의 이런 행보에 대해 로힝야 정치인 아부 타헤이는 “라카인 사회는 이제 다양한 커뮤니티를 품을 줄 아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은 라카인주에 거주하는 모든 공동체가 공동의 적 군부와 맞서 싸워야 하고, 소수민족 커뮤니티끼리는 평화적으로 공존해야 하는 시기”라고 부연했다. 실제로 로힝야 및 라카인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그간 두 커뮤니티의 화합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왔다. 마침내 지난달 ‘아라칸 공동위원회’라는 기구를 출범시켜 2012년을 기점으로 관계가 급속히 악화한 로힝야ㆍ라카인 공동체의 평화 공존 캠페인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출발선에서 다시 불청객이 나타났다. 분열정책이라는 해묵은 카드를 들고 등장한 어둠 속 불청객, 바로 로힝야 대학살을 “끝내지 못한 비즈니스“라 칭했던 흘라잉 총사령관의 미얀마 군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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