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 돼지와 함께 여행을..그때는 울었고 지금은 웃는다
<157>산에도 결이 있다...볼리비아 '할카' 트레킹
늘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요즘, 예측을 불허하는 ‘뜻밖의 여행’을 늘 그리워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의 선물일까. 이리도 숨이 멎을 줄 몰랐다. 그 시간과 장소로 간절히 돌아가고 싶어할 줄 그때는 정말 몰랐다.
볼리비아 '할카 커뮤니티(이하 할카)'는 하얀 도시로 이름난 수크레의 서쪽, 해발 2,500~3,000m 안데스 고지에 2만 6,000여명의 주민이 4개의 마을을 형성하고 살아 가는 지역이다. 그중 특유의 물결 산등성이가 아름다운 마라구아(Maragua)와 섬세한 방직물로 유명한 포톨로(Potolo)가 큰 마을이다.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지구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풍경 사진에 혹해 정한 행선지였다. 가는 방법은 나와 있는데, 돌아올 때는 어디서 어떤 길로 나와야 하는 지 명확하지 않았다. 두 마을 사이는 차가 아니라 걸어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가 보면 알게 되겠지. 거기도 우리처럼 숨을 쉬는 사람이 살고 있으므로.
안데스 산골 마을로 고난의 트럭 여행
본격적으로 할카 여행이 시작되는 곳은 터미널이 아니라 해발 2,600m 수크레 외곽의 공터였다. 고막이 터질 듯 시끄러운 시장통에서 할카로 가는 교통편을 물색했다. 트럭 혹은 버스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운이 나빴는지, 그날은 버스 대신 트럭이 시동을 걸고 있었다. 녹슨 간이 사다리를 이용해 트럭에 오르니 난민촌 풍경이다. 작은 인디오 마을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군것질하는 아낙네 옆 맥주 박스, 그 곁에 가스통, 그 앞에 엉덩이를 시원하게 드러낸 아기가 포대기에 쌓여 있었다. ‘안전’을 위해 나무로 벽을 두른 트럭 안은 명실공히 2층 구조다. 양옆으로 이어 댄 판자 위에 재주 많은 사내가 올라 앉아 있었다.
시동을 걸다가 꺼지지를 반복하며 속을 태우던 트럭이 드디어 출발했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헤비급 포드 머스탱이다. 바람을 온몸으로 받는 오픈카다. 아스팔트에서 황급히 좌회전을 해 비포장도로로 접어든다. 본격적으로 ‘고난의 트럭 여행’이 시작됐다.
어설프게 벽을 세운 나무판자 사이로 시야를 확보했다. 달리고 있는 길이 아찔하고도 바쁘다. 일방통행인가? 겨우 트럭 한 대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은 길이 거짓말처럼 산을 두르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무료할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구 표면을 집대성한 듯한 여러 결의 산이 트럭 여행자를 맞는다. 세상에 없을 색의 향연보다 관심 가는 건 '결'이다. 강풍에 상처 입은 험상궂은 바위가 보이다가, 순풍에 적응한 잘 빚어진 모래더미가 나타난다. 초 단위로 화면이 바뀌는 스펙터클 영화다.
베테랑 기사는 좁은 도로 한가운데에 떨어진 바위를 피하는 묘기를 부린다. ‘산 넘고 강 건너’ 과연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슬슬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판자때기를 너무 꽉 붙든 탓인지, 손에는 어느새 물집이 생겼다. 초스피드 바람으로 인해 헤어스타일은 엉망진창이 돼 있었다. 2시간30분가량 흘렀나 보다. 밖에서만 열 수 있는 트럭의 한쪽 문이 열렸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의미다. "포톨로!"
6시간의 트레킹, 힘든데 황홀하다
포톨로에서 마라구아로 향하는 트래킹은 높낮이 변화가 거의 없는 산길이다. 시작과 끝이 없어 보인다. 저 산만 넘으면 끝이라고 생각할 무렵 다시 길이 이어지고, 다 왔나 싶으면 또 다른 시작이었다. 그저 걸을 뿐…. 인적이 드물어 스스로 길을 만들어간다는 낭만을 품을 법도 하지만, 혹시 잘못 들어섰다가는 말똥 헛간에서 밤을 지샐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기도 했다.
첩첩산중을 가리키는 현지인의 손가락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갓 만들어진 포톨로 광장을 넘으니, 본격적인 '결'과 마주했다. 걸음은 좀처럼 나아가지 못한다. 다리 힘을 모조리 잡아당기는 건 땅이 아니라 마찰력 없는 풍경이다. 이곳에선 산이 재주를 부린다. 서부 영화를 연상시키는 붉은 모래사막, 그 뒤로 몇 겹의 산이 능선을 이루고, 이따금씩 인디오의 농작물이 푸르게 대지를 덮은 풍족한 오아시스가 나타난다. 단 하나도 제자리는 없다. 바람에 실려 가는 구름마저 변화무쌍하게 산의 색깔을 바꾸고, 마모된 바위는 나무 장작처럼 거칠면서도 부서지기 일쑤였다. 터키의 카파도키아처럼 이어지는 기암괴석의 행렬도 바람의 공덕이다. 고로 바람의 숨결을, 바람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듣게 된다. 하긴 목적 달성이라든가 정상 탈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발 딛고 선 이곳이 정상이요, 전망대인 것을.
마라구아에 도착한 건 포톨로를 출발한 지 6시간 후였다. 낙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마라구아 특유의 물결무늬 구릉은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드는 바다 같았다. 먹음직스러운 석화를 가지런히 차려 놓은 것 같다. 허기가 부른 착오가 아니다. 안데스의 전설에 따르면 마라구아는 '해양과 물'을 뜻한다. 이런 깊은 산악마을에서 바다생물 화석을 쉽게 볼 수 있으니 지각 변동의 역사가 경이롭기도 하다.
지금은 미소 짓는다...돼지와 함께 ‘컴백홈’
두 눈이 퉁퉁 부은 채 기상했다. 밤잠을 설친 까닭이다. 지난밤 숙소에서 제공하는 저녁상 앞에서 이곳이 종착지가 아니라는 정보를 얻었다. 수크레로 돌아가려면, 차우나카(Chaunaca)까지 또 걸아야 한다고 했다. 5시간이 넘는 길이었다. 순간이동이라는 초능력이 있었으면 싶었다. 의지도, 다리도 우리에게 믿을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가야 했다. 차우나카까지의 트레킹은 풍경보다 사람을 만나는 길이었다. 단, 환영보다는 방어에 익숙한 산사람들이 많았다. 양을 통째로 내걸고 건조시키는 어느 집 풍경을 찍다가, 웃통을 벗은 사내에게 욕을 대차게 먹었다. 흐드러진 꽃밭에 카메라를 들이댔가가 삿대질하는 아낙네도 만났다. 마냥 얼굴 찌푸릴 일은 아니었다. 이런 오지에서 살아 남으려면 자신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강한 부족의 생존 방법이라 이해하며 발길을 옮겼다.
할카 사람은 혼돈의 영혼과 궤를 함께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들의 직물이 이를 증명한다. 할카 여인들은 어둠의 영적 세계, 우쿠파챠(Ukhu Pacha)가 발현된 붉고 검은 직물을 짜며 생과 맞선다. 태어날 때부터 자기 부족에겐 공포의 세계가 있다는 주입 교육을 받다 보니, 현실과의 소통에 미숙하다. 나와 다른 남은 위협의 상대다. 볼리비아의 공용어인 스페인어 대신 남미 인디오의 전통 언어인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것도 소통의 장벽으로 작용했을 듯하다.
수크레로 가는 교통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허허벌판의 도로에 섰다. 트레킹을 시작한 포톨로로 가는 꽈배기 길을 꽤 닮은 듯하다. 1시간이 지났다. 현지인 동료가 생겼다. 오긴 오는 건가. 오늘 밤은 노상 취침이 될 거란 불안감이 엄습할 무렵, 어제 그 기사가 모는 트럭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일행 앞에 섰다. 돌아오는 트럭 안은 인디오 마을의 축사였다. 돼지와 양과 사람이 기대고 밀치고 웃는다. 여전히 액션 무비를 찍는 드라이브가 이어졌다. 분명히 숨을 꾹 참으며 돌아왔을 고난의 현장 사진을 바라보며, 나는 왜 지금 입꼬리가 올라가는가. 여행은 그런 것이다.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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