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마그리트, 리히터.. '이건희 초특급 컬렉션'에 해외 큰손이 움직인다
“이건희 회장은 ‘탁월한 천재 한 명이 10만~20만명 먹여 살린다’는 인재 경영 철학을 그림 소장에도 적용했어요. ‘그림도 머리(대표작)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지요. 세계 미술사에서 손꼽히는 주요 작가의 대표작이 한국 땅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모은 미술품인데 해외로 나갈까 봐 걱정입니다.”(삼성가 미술품 소장에 정통한 미술 관계자 A씨)
“소장품 수준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 놀랐습니다. 인상파부터 동시대 미술까지 주요 작가 작품이 풀세트로 있는 초일류 컬렉션. 감정하러 갔다가 오히려 미술 공부 하고 왔어요. 돈 많다고 다들 그런 컬렉션을 갖는 게 아닙니다. 안목과 열정이 있었던 거지요. 작품들이 국내에 꼭 남아 미래 세대를 위한 문화 유산이 돼야 합니다.”(감정 참여 미술 전문가 B씨)
최근 삼성가가 상속세와 관련해 고 이건희 회장 개인 소장 미술품 감정을 의뢰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의 행방에 쏠린 관심이 뜨겁다. 미술계에 따르면 지난달 시작한 감정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이달 안으로 감정 평가 보고서가 나올 예정이다. 이 자료를 토대로 유족이 그림 처분 방향을 구체화할 계획이라고 한다.
◇ ‘대표작'만 40년 모은 세계적 컬렉션
지난해 12월 삼성이 법무 법인 김앤장을 통해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등 세 곳에 감정을 맡긴 작품은 1만3000여 점. 한국 고미술과 근현대 미술, 서양 현대 미술을 아우르는 방대한 컬렉션이다. 미술계 관계자는 “시가 1000억원 넘는 세계적 걸작이 꽤 있어 주요 작품 수십 점만 합쳐도 2조~3조원은 거뜬히 넘을 것”이라고 했다. 국내 작품 감정 리스트엔 이중섭 ‘황소’,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김환기 전면점화 등 한국 대표 미술과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등 지정문화재가 즐비하다고 한다.
40여 년간 공들인 결실이다. 이 회장은 1982년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고미술 컬렉션을 중심으로 호암미술관을 연 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소장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잘 아는 한 미술 관계자는 “이 회장은 처음부터 미술관(리움) 설립을 염두에 둬 개인 취향보다는 미술사적 가치를 먼저 생각했다. 유명 작가의 고만고만한 작품 여러 점보다는 얘기가 되는 대표작 한 점 모으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그래서 세계적 컬렉션이 탄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모네 ‘수련', 피카소 ‘도라 마르의 초상’도 있다
핵심은 서양 현대 미술 900여 점이다. 모네, 르누아르, 피카소, 고갱, 미로, 샤갈, 마티스 등 인상파·야수파·입체파 주요 작가 작품이 총망라돼 있다. 그중에서도 주요작은 모네 ‘수련’, 피카소 ‘도라 마르의 초상’, 샤갈 ‘신랑신부의 꽃다발’ 등이다. 수련은 높이 1m, 폭 2m 정도. 대작은 아니지만, 등급 비슷한 작품이 2008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8000만달러(약 890억원)에 거래된 것을 감안하면 고가 작품이다. ‘도라 마르의 초상화’는 피카소가 연인 도라 마르를 그린 그림. 피카소 연인 시리즈 중엔 귀한 작품으로 꼽힌다.
한 미술 전문가는 “한국 사람 정서엔 서양 그림 하면 여전히 모네, 피카소다. 일본 나오시마 지추(地中) 미술관은 모네의 수련 몇 점을 위해 유명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게 설계를 맡겼다. 그만큼 예술사에서 상징성을 띤 작품이 한국 땅에 있다는 점부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 대표작 ‘빛의 제국’(1952)도 있다.
미술 시장 시세로 보면, 정수는 1945년 이후 전후(戰後) 추상표현주의와 색면파 작품이다. 감정가 500억~1000억원 이상 초고가 작품 수십 점이 집중돼 있다.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 색면 추상화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1950~1960년대 대작 3~4점, 독일 추상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대표작인 ‘두 개의 촛불’(1982)과 대형 추상화 2~3점, 스위스 조각가 자코메티의 ‘빈 터'(1950),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방 안에 있는 인물’(1962) 등이다.
이 회장은 1990년대 초중반 로스코 작품을 처음 소장하면서 미국 추상표현주의에 심취했다고 한다. 사이 톰블리, 클리퍼드 스틸 등 대중적으로는 덜 알려졌지만 이 시기 최고로 꼽히는 작가의 핵심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앤디 워홀, 제프 쿤스, 데이미언 허스트 등 팝아트 대표 작가 주요작도 여러 점으로 파악됐다.
◇해외 컬렉터들이 움직인다
미술계 뜨거운 관심사는 삼성이 수조원대 컬렉션을 팔아 상속세로 충당할 것이냐는 점이다. 이 회장 주식에 대한 상속세액은 약 11조400억원. 삼성은 이 회장 별세 6개월이 되는 4월 말까지 상속세를 신고해야 한다. 삼성 측에선 삼성문화재단 출연이나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미술관 기증을 택할 수도 있고,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팔 가능성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자식들은 미술품을 팔아 상속세 부담을 털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클 것”이라고 했다. 이 경우 미술계에서 우려하는 것은 서양 미술 작품의 해외 반출이다. 국내 미술품은 해외 수요가 적고, 문화재보호법 때문에 50년 이상 된 고미술은 해외 반출이 금지돼 있어 거의 국내에서 거래될 가능성이 큰 반면, 서양 미술품은 해외에서 처분될 가능성이 크다. 한 화랑 대표는 “이 회장이 20~30년 전 산 가격에서 평균 30~50배 가까이 뛰었다. 삼성이라도 지금 가격이라면 쉽게 못 샀을 거란 말이 나올 정도로 현대 미술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국내엔 그 가격을 감당할 만한 ‘큰손’ 컬렉터가 없는 데다가 세무조사당할까 봐 몸을 사리는 분위기”라고 했다. 그는 “삼성 측에서 확실한 처분을 원한다면 크리스티, 소더비 등 해외 경매를 선택할 것”이라며 “작품이 한번 한국을 떠나면 다시 들어올 수 없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이미 해외 미술계에선 이건희 컬렉션이 화제다. 한 미술 시장 전문가는 “201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세기의 경매’라고 한 ‘록펠러 3세 경매’를 뛰어넘는 컬렉션이란 얘기가 돌며 해외 유명 컬렉터가 관심을 보인다고 들었다. 해외 미술 시장에선 삼성 소장 이력 자체가 보증수표로 통한다”고 했다. 2018년 록펠러 경매엔 1550점이 출품돼 단일 경매 사상 최고 낙찰 총액 8억3200만달러(약 9210억원)를 기록했다.
◇“국가 자산으로 만들자” 주장도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미술계에선 “국가적 문화 자산으로 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컬렉션인 만큼 어떻게든 해외로 반출되지 않도록 정부와 삼성이 ‘윈윈’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미술 전문가는 “뜻 맞는 미술계 인사 몇몇은 삼성 측에서 소장품을 국가에 기부하는 대신, 국가에서 이건희 컬렉션 전용 미술관을 국립공원으로 탈바꿈하는 용산 기지에 짓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고 했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나라의 보물 ‘국보(國寶)’도 중요하지만, 글로벌 시대엔 세계의 보물 ‘세계보(世界寶)’도 중요하다. 한국에 세계적 미술품이 있다면 국격이 높아지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정도 작품이라면 국민 모금 운동을 해서라도 국내에 남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삼성가에 무조건 남기거나 국가에 기증하라는 것은 무리다. 현행법에 따라 삼성가가 자유롭게 결정하고 그 결정을 존중해 줘야 한다”고 했다. 그는 “컬렉션의 중요성을 인식해 정부가 물납(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대신 내는 것)을 특별 용인하는 방안도 있을 것”이라며 “문화 강국을 외치는 정부가 정작 국가적 문화 이슈엔 함구해 아쉽다”고 했다.
공공 자산화 논의 이전에 미술품 소장에 관한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연심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는 “개인 컬렉션은 사유 재산인 만큼 외부에서 말하기 조심스러운 문제”라면서 “미술 역사는 ‘작가’와 ‘작품 양식’ 역사만이 아니라 ‘소장’과 ‘후원’ 역사가 입체적으로 얽혀 돌아가는데, 한국 사회는 미술 소장을 너무 부정적으로 본다. 이 회장이 주요 작품 소장과 후원으로 우리 미술계 성장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사회적 공감대부터 형성해야 한다. 그래야 삼성 측에서도 마음을 열고 컬렉션을 공공 자산화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삼성 측에선 아직 구체적인 방침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한 미술계 인사는 “유족으로선 미술품을 안 팔자니 상속세 재원 마련이 걱정이고, 해외에 팔자니 주요 미술품을 왜 국외로 유출하느냐는 저항이 있을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 같다. 금전적 가치뿐만 아니라 국민 정서법이 삼성가의 미술품 처리에 결정적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는 기증으로 건립… 우리 국립미술관엔 피카소 판화 한 점 없어
영국, 미국 등 미술 선진국에서 ‘이건희 컬렉션’ 같은 대규모 컬렉션이 상속 이슈에 걸렸다면 어땠을까. 미술 전문가들은 별 무리 없이 유족이 판매와 기증을 선택했을 것으로 본다. ‘문화재·미술품 물납제도’(상속세를 소장 문화재나 미술품으로 대신 내는 제도), ‘문화 기증 제도’(기증하면 소득세나 양도 소득세를 공제해주는 제도) 등 기부 관련 조세 제도가 정교하게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정준모 전 학예실장은 “이런 제도 때문에 해외에선 부호가 엄청난 세금을 미술품 기증으로 해결하는 게 일반적이다. 주요 미술관 소장품 70% 정도가 기증품이고, 기증 작품 수준도 높다. 피카소 판화 한 점 없는 우리 국립현대미술관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뉴욕 휘트니 미술관은 전체 수입 99%가 기부·기증 등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아예 기증으로 시작된 유명 미술관도 많다. 미국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는 부호 앤드루 멜런이 미술품, 건물까지 국가에 기증해 시작됐고, 런던 테이트 미술관은 설탕 사업가 헨리 테이트의 소장품 기증으로 시작됐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고흐 미술관은 네덜란드 정부에서 고흐 조카가 소장한 컬렉션을 기증받아 지은 미술관이다.
정연심 홍익대 교수는 “최근 해외 유명 미술관에선 다양한 문화와 지역을 아우르는 것이 점점 중요해지는 추세인데 국내에선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공립미술관이 한 곳도 없다. 이건희 컬렉션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그는 “물납제 도입으로 이건희 컬렉션 중 일부라도 공공 컬렉션이 될 길이 열린다면, 어마어마한 사회 문화적 자산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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