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주술사들[오늘과 내일/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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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전 미국 할리우드 영화 '터미네이터'는 지금 봐도 섬뜩하다.
2029년 미래에서 온 살인로봇 'T-800'의 위협에서 주인공을 지키려고 역시 미래에서 온 인류가 맞서 싸운다.
로봇이 초래한 핵전쟁, 살인을 서슴지 않는 무자비한 사이보그는 로봇이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에 대한 공포를 각인시켰다.
AI와 로봇이 일자리를 대체하는 '일자리 없는 미래'는 인류의 숙명이니 받아들이고, 정부가 국민에게 최소 생활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게 미 실리콘밸리에서 나온 기본소득 아이디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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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장 개혁에는 왜 입 다무나
기계에 대한 인류의 두려움은 꽤 오래됐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긴 영국 방직공들은 방직기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기계파괴 운동)’을 벌였다. 물리학자가 사람 모양의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어 만든 괴물이 등장하는 영국 작가 메리 셸리의 괴기 소설 ‘프랑켄슈타인’도 이 무렵 나왔다.
최근 기본소득 논쟁은 이런 테크노포비아(기술공포증)에서 비롯됐다. AI와 로봇이 일자리를 대체하는 ‘일자리 없는 미래’는 인류의 숙명이니 받아들이고, 정부가 국민에게 최소 생활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게 미 실리콘밸리에서 나온 기본소득 아이디어다. 그걸 수입해 2017년 대선 쟁점으로 만들고 코로나19 위기에서 재난지원금으로 포장해 되네 마네 하는 게 한국의 기본소득 논쟁이다.
‘일자리 터미네이터’라는 비난과 ‘제2의 러다이트 운동’의 표적이 되고 싶지 않은 실리콘밸리 창업자들이야 정부에 책임을 떠넘기기 좋은 기본소득을 지지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전에 일자리 없는 미래를 피할 대책을 내놓아야 할 정치인들이 한술 더 떠 당장 해보자고 덤비는 건 무모하다.
세계화와 자동화로 중산층 일자리가 줄고 있다지만 ‘기본소득’이라는 백기를 들 때는 아직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자동화 가능성이 70% 이상인 일자리가 회원국 전체 평균(14%)보다 낮은 약 10%다. 당장은 신기술이 한국에서 급격한 고용 감소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OECD의 판단이다. 로봇과의 일자리 전쟁에서 반격할 시간이 우리에겐 남아 있다는 얘기다.
일자리는 생계유지 도구만도 아니다. 청년들이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수단이다. 올해 국방비(52조 원)의 약 6배인 300조 원을 투입해 전 국민에게 월 50만 원의 기본소득을 쥐여 줘도 제대로 된 일자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폭등하는 집값과 취업난 속에서 좌절하는 청년들의 분노를 달랠 길이 없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18일 “코로나19 위기가 끝나더라도 수백만 개 일자리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맥킨지는 기업 출장의 20%가 영원히 사라지고 노동자의 20%가 재택근무를 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미 미 실업자의 3분의 2가 직종 변경을 검토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새 일자리와 전직 교육, 직업 훈련프로그램이 필요해진다는 걸 뜻한다.
OECD는 신기술의 위협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생산성 차이가 큰 한국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았다.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고 세계적으로 실업이 급증하는 코로나19 위기에도 파업하는 대기업 노조가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새 시대에 맞는 노사협력 모델이 절실하다. 우리 대학과 직업훈련 프로그램은 어떤가. 새 일자리로 가는 길을 청년들에게 열어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해묵은 노동시장 구조개혁 과제는 놔두고 ‘기본소득 될 때까지’를 무한 반복하는 건 비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겠다는 주술사처럼 터무니없다. 진짜 ‘일자리 터미네이터’는 로봇이 아니다. 피할 수 있는 미래를 피하지 못하게 하고, 가능한 해법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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