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천수의 사쿠나히메
[경향신문]
무언가를 쓰고 말하며 먹고살다 보니, 무언가를 입에 넣을 때 간혹 그 먹거리가 만들어져 나에게까지 온 거리를 생각하곤 한다. 플랫폼이니 머신러닝이니 무언가 새로운 비즈니스를 우리는 손쉽게 먹거리라고 부르곤 하지만, 진짜 입에 넣는 그 먹거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좀 더 원론적으로 생각하자면, 그 모든 것들의 기원은 넉넉한 식량 생산이다. 먹고 남을 만큼 만든 농부의 거래는 다른 이로 하여금 먹고사는 것 이상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힘을 사회에 제공한다. 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현대사회의 상거래와 유통, 교환의 장은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활동의 근본이 어디인지를 잊게 만든다.
2020년 출시된 게임 ‘천수의 사쿠나히메’는 겉보기엔 평범한 액션 게임이다. ‘슈퍼마리오’처럼 점프하며 던전 안의 요괴들을 무찔러 나가는 기본적인 형식에 충실하지만 이 게임은 사뭇 남다른 지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 바로 캐릭터 성장을 만드는 레벨 업 방식이다.
많은 게임에서 주인공 캐릭터는 전투에서 승리해 경험치를 쌓거나 아이템을 습득하면서 점차 강해진다. 주인공의 성장은 후반으로 갈수록 강해지는 적들과 균형을 맞추면서도 점점 게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방식인데, ‘천수의 사쿠나히메’에서 주인공의 성장은 게임의 또 다른 중심, 벼농사를 통해 이뤄진다.
가상의 판타지 세계에서 곡식의 성장을 담당하던 신인 주인공 사쿠나는 일련의 사고를 일으켜 지상으로 쫓겨나고, 다시금 신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주어진 섬의 요괴들을 물리쳐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을 키우는 힘은 벼농사다. 게임 속에서 벼농사는 상당히 디테일하다. 논에 시기마다 적당한 물의 양을 맞춰야 하고, 비료는 상시로 퍼날라야 한다. 봄에 밭 갈고 모를 내며, 여름에 잡초 뽑고 물관리를 하는 것뿐 아니라 수확과 탈곡, 도정까지 전 과정을 거쳐 한 해 새로 뽑는 햅쌀의 양과 질이 그다음 세션에서 주인공 사쿠나의 체력과 공격력을 갈음하는 지표가 된다.
단기적으로는 농사로 얻은 쌀로 끼니를 지어 먹으며 기력을 회복하고, 장기적으론 좋은 쌀을 뽑아내 캐릭터의 능력치를 향상시키는 게 ‘천수의 사쿠나히메’가 제시하는 성장 구조다. 다른 액션 게임과는 사뭇 다른 이 구조는 굉장히 독특한 지점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앞서 이야기한 모든 행위의 근본에 자리하는 먹거리 생산, 농사의 문제다.
전투의 배경이 농사를 통한 먹거리 조달임을 강조하는 게임의 구성은 대단히 직관적인 통찰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은연중에 잊고 살던 사회의 기원을 일깨워준다. 비단 게임 속 전투뿐이겠으랴. 1차·2차에서 N차로 이어지는 산업과 사회의 고도화는 자꾸 우리에게 이 거대한 체계의 가장 근본적인 시작점이자 우리가 영원히 저버릴 수 없는 어떤 노동의 이야기를 가려버린다. ‘천수의 사쿠나히메’가 보여주는 성장 과정들은 모든 문명의 기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잘 보이지 않는 본질을 향한 일깨움이 된다. 쌀 한 톨 내 손으로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만들어내는 글과 말이 내 입에 들어가는 먹거리만큼 가치를 내고 있는가. ‘천수의 사쿠나히메’라는 게임이 어느 공부노동자에게 던져준 화두다.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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