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분노와 응징의 '사이다'
응징과 보복의 언어로 가해자 폭력
관행에 대한 분노는 분발 이끌지만
사람에 대한 분노는 인성만 파괴해
대한민국 배구계의 자랑이었던 쌍둥이 선수들은 과거의 폭력에 대한 뒤늦은 사과와 후회를 하고, 그들 어머니에게 주어졌던 장한 어버이상이 취소됐다. 그리고 지금은 관전자인 군중의 분노와 응징의 뒤풀이가 한창이다. 이젠 우리 사회의 루틴(routine)이 돼버린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여자 배구 학폭 사태 진상 규명 및 엄정 대응 촉구’ 글이 올라왔고, 이미 10여만 명이 동의를 클릭했다. 해당 선수들은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지만, 영구 퇴출을 요구하는 군중의 목소리는 드높다. 그런 한편에선 강도 높은 비난과 응징의 언어들이 ‘사이다’로 칭송받고, 관련 기사마다 사나운 댓글이 달려든다.
이런 장면 역시 이젠 우리 사회의 일상이다. 유명인의 과거 비행이 폭로되고, 당사자가 뒤늦은 후회와 사과의 코스프레를 하고, 군중은 달려들어 분노와 응징의 뒤풀이를 하고, 매체들은 뒷얘기를 파헤치면서 독한 응징의 언어 경쟁을 하고, 항간에선 시쳇말로 ‘사이다 썰’이라는 분노와 응징의 언어가 넘친다. 그리고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만 생매장한 뒤 피해 회복과 상관없이 그 사건은 잊힌다.
과거의 비행과 폭력이 뒤늦게 폭로되는 것은 당시의 피해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피해자는 제대로 사과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계속 피해자인 채로 남아 트라우마가 됐을 수 있다. 용서와 화해가 가능한 골든타임은 폭력과 피해가 일어난 그 순간 또는 아주 가까운 시간이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절대로 피해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많은 불행한 사건을 거치며 알게 됐다. 그 같은 ‘사람의 일’에는 용서와 화해가 가능한 것도 있고, 불가능한 것도 있다. 어떤 문제든 당사자가 아니고선 알 수 없다.
순간순간 타깃을 정해 응징의 칼날을 세우는 군중을 보는 것은 섬찟하다. ‘잘못에 대한 폭력적 대응’ 역시 우리 사회의 일상이 되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렇다면 응징의 언어를 남발하는 군중의 의도는 과연 순수한 것일까. 그것이 자신의 올바름을 세우는 일 혹은 작은 정의의 실천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폭력은 어떤 경우라도 올바를 수 없고 순수할 수 없다.
자신의 폭력에 무감각하고 응징의 의지만 충만한 것이, 자신의 힘만 믿고 약자를 괴롭힌 가해자들과 뭐가 그렇게 다른가. 일명 ‘모두 까기’에 환호하고, 조금이라도 더 독한 응징의 언어를 통쾌한 ‘사이다’라고 칭송하는 시대. 어쩌면 지금 우리 시대엔 쾌락을 위해 응징의 사냥감을 찾는 야만성만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명적 인간의 가장 큰 힘은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사고할 수 있으며, 타인의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이다. 물론 분노의 공감 역시 중요한 공감의 영역이다. 분노의 에너지가 분발과 발전의 기폭제가 되는 사례는 많다. 최근 화제가 됐던 방시혁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대표의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그는 음악계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분노하고 그에 맞서 싸우며 분발할 수 있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이처럼 분노의 에너지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상과 관행을 겨냥한 것이어야지 사람을 파괴하는 데 활용해선 안 된다. 타인을 해치고, 분풀이하는 폭력은 어떤 경우라도 야만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은 폭력의 관행에 절어 있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일 것이다.
현대 사회정의론에서는 ‘분배’와 함께 ‘인정’(recognition)을 중요한 정의 개념으로 제시한다. 무시·차별·모욕·착취·학대·폭력 등은 그 자체로 ‘사회부정의의 효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정의와 관련하여 이 단순명료한 개념조차 학습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아이도 어른도 상대에 대한 모욕과 학대를 이렇게 쉽게 저지르고, 군중은 빌미만 잡히면 사람에게 응징의 언사로 협박한다.
순자(荀子)는 “선한 것을 분별하는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예(禮)를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한데 예란 동양의 윤리 기준으로 볼 때 도덕인의(道德仁義)가 다 무너진 후 마지막에 남는 것, 윤리 사회의 마지노선이기도 하다. 최소한 예의만 알아도 이런 폭력적 논란은 일지 않았을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문명사회의 끝 언저리 어디쯤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대와 학폭도 무섭지만, 폭력의 언사를 정의라 믿는 군중도 무섭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응징이 아니라 공감 능력과 예의 있는 삶에 대한 학습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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