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펑과 장제스 반대운동에 앞장 국민당 특무기관, 통비 혐의 체포 미 유학시절에 만난 부인 류란화 미국대사 등에게 남편 구명 운동 위, 홍위병 닦달에 치욕 느껴 자살 동병상련 시중쉰, 가슴 치며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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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4〉
1966년 문혁 초기, 신중국 국가의전의 창시자 위신칭(余心淸·여심청)은 홍위병들의 닦달에 치욕을 느꼈다. 집에서 목을 맸다. 4년 전부터 심사와 심문에 시달리던 시중쉰(習仲勛·습중훈)은 옛 동료의 자살 소식에 가슴을 쳤다. 훗날 측근에게 이런 말을 했다. “위신칭은 우리와 길을 함께한 고급지식인이었다. 무슨 일이건 방향이 분명했다. 강직하고, 아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모욕 대신 죽음을 선택했다. 정통파 지식인답게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애석할 뿐이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위신칭은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의 심복”이란 소리를 많이 들었다. 펑은 달랐다. “훌륭한 동지이며 동료다. 안사람끼리도 절친한 친구다. 내가 먼저 태어나다 보니 막내동생 같은 생각은 들었다. 심복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 사돈이란 말은 할 수가 없었다. 펑은 아들 훙다(馮洪達·풍홍달)와 위의 외동딸 화신(余華心·여화심)이 결혼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펑의 아들과 위의 딸 결혼
펑위샹과 위신칭은 유사한 점이 많았다. 16년 터울로 10리 남짓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다. 가정형편은 둘 다 엉망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독서와 서예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펑은 15세 때 군복을 입었다. 위도 16세 때부터 밥벌이에 나섰다. 편지 대필과 도배로 입에 풀칠했다. 난징(南京)에 학비 안 받는 학교가 있다는 말 듣고 솔깃했다. 가보니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신학원(神學院)이었다. 4년 후 그 유명한 ‘진링(金陵)신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목사 자격도 땄다.
교회는 위신칭을 허난(河南)성에 파견했다. 위는 목회활동을 열심히 했다. 설교도 특색이 있었다. 일반 목사들처럼 상제(上帝)나 천국(天國)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구국(救國)과 구민(救民)을 소홀히 하는 군벌 비판과 혁명군 양성을 역설했다. 후난성 독군(督軍) 펑위샹은 위의 설교가 맘에 들었다. 군목으로 초빙했다. 미국 유학도 주선했다. 컬럼비아 대학 교육학과에 적을 둔 위신칭은 중국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춘펑(春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바람이 치맛자락 스치면 여학생들은 “위신칭은 꿈쩍도 안 하는데 얘가 왜 난리냐”며 얼굴을 찌푸렸다. 먼저 와있던 류란화(劉蘭華·유란화)도 마찬가지였다.
류란화는 산시(山西)성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전당포로 거부를 축적한, 중국 4대 가족의 대표 격인 콩샹시(孔祥熙·공상희)의 집안과 세교(世交)가 있었다. 베이징의 명문 베이만(貝滿)여중을 마치고 콩샹시의 조카와 약혼을 했다. 약혼자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같은 반 친구였던 리더촨(李德全·이덕전)에게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유학길에 올랐다. 베를린 대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갔다.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중국 유학생 모임에서 위신칭을 만났다. 리더촨과 육군순열사 펑위샹의 결혼소식 듣고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였다. 염치 불구하고 9살 어린 위신칭에게 손을 내밀었다.
위신칭은 류란화의 손을 잡고 귀국했다. 펑위샹은 군인과 공무원 자녀 교육을 위한 교회학교를 지었다. 교장 위신칭은 항일교육에 전념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 밖에서 강한 적이 우리를 넘보고, 안에서는 민중의 적이 국민을 압박한다.”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이 동북3성을 점령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항일을 포기하자 펑은 반장제스 세력 규합에 팔을 걷어붙였다. 위도 학교 교장직을 걷어치웠다. 장제스 반대운동에 합류했다. 장제스가 체포령을 내리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저우언라이, 통전공작 지시
국·공합작으로 항일전쟁이 시작되자 위신칭은 귀국했다. 펑위샹이 있는 충칭(重慶)으로 갔다. 충칭의 중공연락책임자는 국민당군 중장계급 단 저우언라이였다. 저우는 위를 신임했다. 펑의묵인하에 전 서북군 지휘관들 통전공작을 지시했다. 전쟁이 끝나고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위는 국민당 특무기관에 끌려갔다. 공산비적과 내통한, 통비(通匪)혐의로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위는 굽히지 않았다. “내가 유죄라면 통비의 원조는 총리 쑨원(孫文·손문)이다. 너희들은 총리의 신도들이다. 장징궈(蔣經國·장경국)는 모스크바에서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과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통비는 무조건 사형이었다. 유언도 남겼다. “중국은 암흑이다. 암흑은 서광을 이기지 못 한다. 동지들은 슬퍼하지 마라.”
류란화는 미국에 있었다. 어린 남편을 감옥에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비탄에 잠긴 펑위샹부터 안심시켰다. 친구 남편인 중국주재 미국대사 스튜어드에게 집행 연기에 나서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귀국도 서둘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