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언어정담] 눈부신 카이로스의 시간을 위하여
꼭 안해도될 일 정리하는 법 터득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 내려놓고
깨어있는 자신과 대면할 용기 생겨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때는 시간이 평소보다 훨씬 빨리 가는 느낌이 든다. 좋아하는 사람, 영화, 책, 음악과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은 왜 그토록 빨리 가버리는지. 그럴 땐 시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 진정 좋아하는 일 앞에서는 아무 것도 계산할 필요가 없으니까. 반면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을 떠맡았을 때는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런 시간의 놀라운 주관성을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다.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이 분 초 단위로 측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의 시간은 오직 내 마음 속에서 저마다 다른 느낌과 향기로 빛나는 시간이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면 내 시간을 아무리 퍼주어도 아깝지 않은 느낌, 좋아하는 일에 몰입할 때는 평생을 다 바쳐도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 때, 카이로스의 시간은 유난히 빛난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어쩔 수 없이 함께 해야 했던 지난 1년은 너무 힘겨운 속박의 시간을 안겨줬다. 이동의 자유, 마음껏 일할 자유, 언제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자유를 빼앗긴 우리에게 절실한 시간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시간, 지금이 몇 시인지, 밥을 먹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한껏 나 자신의 기쁨에 빠져있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비결이 아닐까. 나는 너무도 소중한 카이로스의 시간, 특히 ‘여행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한동안 의기소침해졌다. 그런데 극도로 이동을 자제한 뒤 조용히 한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바쁘게 돌아다닐 때는 잘 쓰지 않던 마음의 근육을 자주 쓰게 됐다. ‘홀로 사유하는 시간’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다. 타인과의 만남이 극도로 줄어들자 오직 나와 집, 나의 일만이 남은 듯한 느낌이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나치게 고민하지 않고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문제에 더욱 차분히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기화되면 외롭고 적적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고독의 창조적 의미’를 알게 됐다. 비로소 나 자신과 온전히 마주하는 느낌. 나 자신과 아주 가까워지는 느낌. 인생에서 ‘나 자신’이라는 존재와 처음으로 진짜 친구가 된 느낌이었다. 오직 깊은 집중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내 안의 핵심적인 자아와 대면하는 기분이었다. 내 무의식이 심해라면, 그 심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수초 같은 생각들, 심해 깊은 곳에 숨어있는 가장 영롱한 산호초 같은 생각들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카이로스의 시간이라 믿었던 것은 과도한 긴장이나 흥분 상태였을지 모른다. 눈부신 깨달음의 순간은 바로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라는 에고의 시선을 완전히 내려놓을 때 만날 수 있었다. 때로는 사회적 자아를 내려놓고 해맑은 나 자신과 만날 용기가 필요하다. 직업과 역할과 신분으로 규정된 ‘나’가 아니라 ‘그냥 아무도 아닌 나, 아무 꾸밈없는 나’로 지낼 시간이 필요하다. 작가라는 직업도, 정여울이라는 이름도 내려놓고 ‘나 자신’과 온전히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내게 필요한 새로운 카이로스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코로나 이후 ‘정말 하고 싶은 일’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나누는 기준이 훨씬 선명해졌다.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법을 배우게 됐기에 카이로스의 시간은 코로나 이후 오히려 늘어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더욱 사교적 만남은 줄이고 나의 일에 매진할 수 있게 됐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온전히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 타인의 삶을 엿보는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의 순수한 기쁨에 집중하는 시간이다.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출렁이던 잡스러운 생각들이 사라지고 오직 나 자신과 대면할 용기가 생겼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깨어있음의 시간이며,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여론독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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