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프랭클린 마오쩌둥..까다로운 내 심사 통과해야죠
머릿속으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흰 가운을 입은 이호중 위변조대응센터장(51)이 나타났다. 2017년 세계 최초로 2006년판 미화 100달러짜리 신종 슈퍼노트(초정밀 위조지폐)를 발견하면서 해외에도 알려진 인물이다. 이력도 화려하다. 1995년 옛 외환은행에 입사해 외환 업무 전문성을 쌓은 후 2001년 국가정보원에 들어가 13년간 위폐담당관으로 근무했다. 이 센터장은 국정원에 근무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위폐는 외교안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또 "위폐 감정은 자본주의에 신선한 혈액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며 자부심을 내보였다.
―이력이 특이하다. 국정원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
▷위폐 샘플을 수집해 최신 동향을 작성하고 국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해 필요시 요소요소에 배포하는 업무를 했다. 국정원에는 해외 파견관을 통해 전 세계에서 발견된 위폐 관련 자료가 모인다. 24시간 긴장의 연속이었다. 초정밀 위조지폐인 '슈퍼노트'는 전 세계적으로 적성국 조폐기관이 만든다는 게 정설이다.
―국가 차원에서 위폐를 만든다?
▷화폐 표면이 오돌토돌한 요판 인쇄 기술이나, 각종 위변조 방지 장치는 상업용으로 구입하는 데 제약이 있어 일반 범죄조직이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다. 북한도 국제사회로부터 위폐 제조국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북한과 접한 중국 접경지역에서 위폐가 많이 발견돼 왔기 때문이다.
―북한이 위폐를 제작한다는 내용의 영화도 있다.
▷영화 '공조'가 북한이 미화 원판을 반출해 위폐를 제작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취지는 실제 지폐 제작 방식과 맞닿아 있다. 화폐 제작에 사용되는 니켈·크롬 합금본 원판과 이를 복사한 알루미늄 복사본으로 나뉜다. 실제 지폐는 이 알루미늄판으로 만든다. 다만 '공조'에서 상업용 인쇄기로 위폐를 찍어낸다는 설정은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슈퍼노트에는 1200억원가량이 소요되는 시설에서나 만들 수 있는 특수용지, 잉크가 사용되고 볼록인쇄 과정을 거친다.
▷기관 특성상 공개할 수 없는 내용이 많다. 다만 2005년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사태'를 국정원 위폐 담당자로서 직접 겪었고, 이는 국내 시중은행에도 작지 않은 파장을 줬다는 점은 말할 수 있다. 미국 재무부가 BDA를 북한이 제조한 위폐를 유통하는 통로로 지목하고 미국 내 은행과 BDA 간 거래를 금지했고, 알려진 대로 BDA는 끝내 파산했다.
―국내에서의 위폐 제작 의혹은 없었나.
▷국정원에서 있던 일들을 밝히기는 어렵다. 국정원에서 나온 후 2016년 서울 영등포구 고물상 폐지 더미에서 북한 화폐 5000원권 8만장이 발견돼 보도된 적이 있다. 다만 그 배후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당시 보도에 따르면 해당 지폐는 수사기관에 의해 소각됐다). 분단 상황에서 이런 위폐 제작 의혹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광복 직후 1946년 남조선노동당의 서울 인쇄소 조선정판사에서 위폐가 나왔다는 '정판사 사건'이 있었다. 다만 이게 정말 남로당의 범행인지 미군정의 공작이었는지는 아직도 해석이 분분하다.
―위폐를 근절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국력이 커지면 위폐가 더 유통될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 적발되는 위폐는 외화 기준 연간 10만~15만달러 규모인데, 통상 적발량은 실제 유통량의 5%로 추정한다. 원화 위폐는 유통량이 적은 편인데 코로나19 영향으로 지난해 272장, 304만5000원 상당으로 더 줄었다(2019년에는 292장 420만원 상당이었다). 국력 신장과 함께 말레이시아 링깃 등 우리나라에 유입되는 위폐도 다양해지고 있다. 미국 달러와 유로화, 중국 위안화 등은 통상 10년 주기로 화폐를 교체한다. 아무리 최첨단 위조 방지 기술이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수명을 다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세계에서의 위상이 커진 만큼 화폐 품질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국정원에서 일하다 하나은행으로 돌아온 이유가 뭔가.
▷공무원으로서 국가의 위폐 대응에 참여한다는 것은 보람 있었다. 하지만 서기관으로 승진할 즈음 순환근무로 인해 분야를 바꿔야 하는 상황에 놓이니 고민이 됐다. 결국 위폐 감정 업무를 계속 하고 싶어 하나은행으로 돌아왔고, 이 위변조대응센터를 만들었다.
▷하루 이곳으로 들어오는 50만장가량의 지폐를 전수검사한다. 물론 1차적으로는 기계로 걸러내지만, 기계에서 걸러진 위폐 의심 지폐는 사람이 직접 검사해야 한다. 이를 위해 1대당 3억원짜리 CSI급 고성능 광학분석기도 갖췄다. 전국 650개 지점과 실시간 위폐감정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하나은행의 국내 시중 환전 거래 비중이 28%임에도 국내 위폐 적발량의 80%를 담당한 비결이다. 검찰, 경찰, 관세청에서도 감정 의뢰를 한다.
이 센터장은 인터뷰 도중 서울의 한 경찰서에 보내는 감정의뢰서를 꺼냈다. 지난달 강남 지역에서 신고된 50달러짜리 지폐에 대해 위폐 여부를 경찰이 물어왔다고 한다. 두 명의 위폐 감정 직원과 이 센터장의 서명이 담긴 의뢰 답변서에는 "위조지폐로 추정된다"고 써 있었다.
센터는 이 지폐의 글자가 볼록인쇄 처리되지 않고 매끈하게 인쇄돼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진폐에서 나오는 인물 숨은그림도 이 지폐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적었다. 적외선과 자외선을 비췄을 때 반응도 달랐다. 진폐는 특수잉크를 사용하기 때문에 자외선을 쬐면 형광은선이 보여야 하고 적외선을 쬐면 흰 두 줄이 보여야 한다. 이 같은 위폐 감정은 CSI급 장비로 소개한 광학장비 'VSC―8000'을 갖추고 있어 가능했다. 가시광선으로는 129배율로 확대해 볼 수 있고, 자외선과 적외선을 단파에서 장파로 다양하게 조건을 달리해 쬐고 그 반응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수사기관의 감정 의뢰가 자주 들어오나.
▷자주 들어오는 편이다. 지난해에도 서울 강남 지역에서 말레이시아 화폐 100링깃짜리 100장에 대한 감정 의뢰를 받았다. 동남아 무역상이 거래 후 대금으로 받은 돈인데 이 화폐들은 위폐로 감정됐다.
―2017년 신종 슈퍼노트를 발견한 게 큰 성과로 알려져 있다.
▷2017년 10월 한 지점에서 환전 중 지폐가 위폐감별기에 계속 걸린다며 연락해왔다. 그 지폐 실물을 받아보고 적외선과 자외선을 활용해 정밀분석해 보니 이제껏 발견된 적이 없는 위폐라고 추정됐다. 국정원과 공조해 결국 신종 위폐임을 확인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물론 인터폴에 우리 센터 분석 자료가 제공돼 세계 최초 슈퍼노트임이 증명됐다.
―위폐 감정 전문가는 어떻게 양성하나.
▷일반 직원들을 대상으로 6개월짜리 위폐 감정 고급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과정을 거치면 36개국 화폐 700여 개 권종을 감정할 수 있는데, 슈퍼노트도 걸러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된다. 지폐 100장을 2분 안에 감정하는 테스트도 거친다. 이 중 많게는 7장 정도까지 위폐가 섞여 있다. 당연히 무조건 합격은 아니다. 10%는 항상 과락을 시킨다. 우수 수료생은 홍콩 외화현찰시장에 파견을 보낸다. 이 중에서 다시 선발된 인원이 우리 센터에서 근무하게 된다.
―모바일 결제량이 늘고 있다. 위폐감정가는 사양 직종 아닌가.
▷결제수단으로서 화폐 비중이 준 것은 맞는다. 하지만 시중 화폐 유통량 절대치는 오히려 늘었다. 현용 화폐 도입 전에는 26조원 규모였는데 지난해에는 130조원에 달했다. 5만원권이 수표를 대체하고 K팝 등 국력 신장에 따라 한국 돈에 대한 해외 수요도 늘었기 때문이다. 하나은행에서는 여전히 위폐 감정 분야가 직원들이 근무하고 싶어하는 선호 부서다. 연구과정 경쟁률도 매년 10대1을 넘는다.
▶▶He is…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장을 맡고 있다. 1995년 옛 외환은행에 입사해 외화 수출입과 외국환 규정을 담당하며 '외환 인생'을 시작했다. 그 전문성을 인정받아 2001년 국가정보원에 채용돼 금융범죄·위폐분석 담당관으로 근무했다. 2013년 하나은행으로 돌아와 위변조대응센터를 설립, 현재까지 센터장으로 근무 중이다. 미국 국토안보부 비밀검찰국에서 위폐 전문가 과정, 미국 법무부 위폐·자금세탁 분석 과정을 이수했다. 2006년 국정원장 표창, 2017년 한국은행 총재 표창을 받았다.
[이윤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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