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동심을 간직했기에 어른이 된다 [김소영의 어린이 가까이]

김소영 2021. 2. 1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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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에 대한 오해

[경향신문]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순수한’ 동시에 ‘미성숙한’ 것으로 취급되는 어린이의 마음
언제부터가 어른의 마음인 걸까…동심이 어른과 아이 나누는 기준인가
우리는 마음을 버리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사람의 안 쪽으로 들어가면 어린이의 마음이 있다

실시간 온라인 강연 중에 작은 방송사고를 냈다. 강연은 출판사에서 마련한 ‘독자와의 만남’ 행사로, 내가 좋아하는 어린이문학 작품들과 어린이를 그린 그림 등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그중에는 노먼 록웰의 ‘발견(Discover)’이라는 그림도 있었다. 한 어린이가 부모님 것으로 짐작되는 서랍장에서 산타 옷과 수염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은 얼굴로 서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화면에 띄우고 화가의 재치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카메라 너머 출판사 분들도, 댓글 창도 술렁였다. 시청자 중에 어린이도 있다는 것이었다.

방송을 시작할 때 ‘어린이와 함께 보고 있어요’라는 댓글도 읽어 놓고는 깜빡 잊었다. 나는 하던 말을 얼버무리고 얼른 화면을 넘겼지만 등에 땀이 났다. 이 글의 독자 중에도 어린이가 있을지 모르니 더 자세히 쓰지는 않겠다. 어쨌든 나중에 들으니 “아니지?” 하고 울먹인 어린이도 있고, “친구들 얘기를 듣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며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어린이도 있었다고 한다. 산타의 정체는 독서교실에서도 논란이 일곤 하는 주제다.

“어떤 애들은 산타가 엄마라는데, 저는 아닌 것 같아요. 우리 엄마가 그렇게 비싼 걸 사줄 리가 없거든요.”

꽤 논리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어린이에게 뭐라고 대꾸해야 한단 말인가. 그럴 때면 슬쩍 화제를 바꾸곤 했다. 어린이가 산타의 비밀을 아는 순간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애쓰는 보호자와 선생님들도 계시다고 알고 있다. 솔직히 나는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게 좋지 않은가 하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알려주고 싶었던 건 아닌데!

이제 5학년이 되는 정우에게 믿거니 하고 이 이야기를 하다가 혹시 하고 멈칫했다. 다행히 정우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동심 파괴’하셨네요.”

정우는 산타에 대해 안 지는 오래됐지만, 안 믿는다고 하면 선물을 못 받을까 봐 한동안은 계속 믿는 척했다고 한다. 가만, 선물을 받고 싶어서 산타를 믿는 척하는 것도 ‘동심’ 아닌가? 정우가 ‘저야 뭐 이제 다 컸죠’ 하는 얼굴이라 차마 그런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웃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동심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늘 조심스럽다. 어린이라는 존재를 또렷이 드러내는 ‘어린이’라는 말은 환영하면서 ‘어린이의 마음’을 가리키는 말을 내키지 않아 한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다. 단어 자체로 보면 어린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 하고자 하는 바를 뜻하는 말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 문제는 이 말이 쓰일 때는 주로 어린이의 밝고 착한 마음과 순진하고 귀여운 생각 등 긍정적인 뜻만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동심’ ‘동심을 지켜준다’처럼.

물론 그런 ‘동심’을 마주할 때도 많다. 예은이는 친척 어른이 보이스피싱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데 그 보이스피싱 하시는 분이요…”라고 표현했다. 내가 웃으면서 “그럴 때는 ‘분’이라고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했더니 예은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떨 때요?” 하고 되물었다. 이런 게 동심이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요즘 한자를 많이 배워서 웬만한 단어는 한자로 쓸 수 있다는 선재가 의기양양하게 “1子無식”이라고 썼을 때도 그랬다. 길 잃은 강아지를 동네 세탁소에 데려와 도움을 청하고, 주인이 찾으러 올 때까지 번갈아 자리를 지키던 세 어린이를 보았을 때도 이런 것이 어린이의 마음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어린이의 마음에는 그늘도 있다. 조절하기 어려운 짜증과 불만, 질투와 이기심이 있다. 어리기 때문에 오히려 편견이 심하거나 무례한 어린이도 있다. 이런 마음에 대해서도 어른들은 ‘지켜주고 싶은 동심’이라고 할까?

나는 어린이책의 독자로서 ‘당당한 어린이’ ‘되바라진 어린이’ 캐릭터를 특별히 좋아해왔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 그런 어린이를 만났을 때는 부끄럽게도 화가 날 때가 더 많았다. 현실의 어린이들은 책 속에서와 달리 마냥 천진난만하지 않다. 언젠가 도서관 앞 건널목에서 맑은 얼굴로 웃으며 떠드는 어린이들을 보고는 슬쩍 옆에 서본 적이 있다. 대체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는 걸까, 나는 왠지 조금 들떠서 대화를 엿들었다. 그리고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내용은 알 수 없고 비속어와 혐오 표현이 난무한 대화였기 때문이다. 다시 봐도 어린이들 얼굴은 그저 해맑았다. 어린이에게 좋은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별개로, 나 역시 어린이에게 ‘동심’을 당연한 것으로 기대해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순간이었다.

동심에 대한 오해는 결국 어린이를 어른의 세계와 떼어놓게 만든다. 어린이가 옳은 마음이나 천진한 낙관을 보여줄 때 단지 어려서, 순진해서, 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심은 찬미되는 만큼이나 반대로 무지하고 현실 감각이 없는 것, 철없는 생각으로 치부될 때가 많다.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릴 수밖에 없고, 잃어버려야 성숙해지는 무언가로.

나 역시 어른이 미성숙한 행동에 동심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면 눈살이 찌푸려졌고,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에 집착하는 것도 경계해왔다. 어른에게는 어른의 몫이 있으니까. 그건 동심을 ‘어린이의 마음’으로 바꾸어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어린이의 마음은 대상화될 수밖에 없는 걸까?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면 머리가 너무 복잡해져서 고민을 미루고만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이번에 중학교에 입학하는 태현이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태현이는 이제 어린이날 선물을 못 받을 것이 아쉽다고 하면서 몇 살까지가 어린이냐고 물었다.

“정해진 건 없지만 보통 초등학생까지를 어린이라고 하긴 하지. 그런데 ‘유엔 아동권리협약’에서는 열여덟 살이 안 된 사람들까지 어린이라고 해. 성인이 되기 전 사람들을 모두 어린이로 보호하는 뜻일 거야.”

“그럼 우리나라도 중학교 1학년까지는 어린이로 해주면 좋겠어요. 저도 이제 막 어린이가 끝나가지고 아직 모르는 게 많거든요.”

‘어린이가 끝난다’니, 그럼 ‘어린이의 마음’이 이제부터 ‘청소년의 마음’이 되는 걸까? 열아홉 살이 되면 ‘어른의 마음’이 되고? 어딘가 이상하다.

곰곰이 따져보니 우리 몸과 마음은 성장하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 몸의 성장은 자연의 일이고 나이와 상관이 있다. 일정한 방향이 있고 어느 순간 멈추며 그다음에는 소멸을 향해 간다. 마음은 그렇지 않다. 몸과 달리 자랐다가 뒷걸음치기도 한다. 정체기를 겪기도 하고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갑자기 도약하기도 한다. 사람마다 성장을 맞이하는 시기도, 모습도 다르다. 그러니 어린이의 마음이라고 해서 꼭 어른보다 미숙한 것은 아니다.

말장난 같지만 마음이 자란다는 것은 전 단계의 마음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동심원을 그리는 것이다. 어린이의 마음을 가장 안쪽에 두고, 차차 큰 원을 그려가는 것. 정확히 말하면 원은 아닐 수도 있다. 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면 어느 부분은 푹 꺼지고, 어느 부분은 부풀어올라 모양이 좀 이상한 도형이 되어 있다. 어린 시절 중에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깊은 골짜기들도 있다. 어느 부분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지만 나중에 열심히 메워서 꽤 괜찮은 모양으로 만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라는 사람의 안쪽으로 걸어들어가면 어린이의 마음이 있다. 내내 그 마음만 들여다보고 살아도 곤란하지만 결코 잊으면 안 된다. 내 삶은 단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도서관 강연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린이 독서교육에 관심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한 ‘독서법’ 관련 강연이었다. 그런데 강연장에 가서 보니 청중의 절반 정도는 노년층 이용자들로, 독서 동아리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라고 했다. 내가 준비한 내용은 어린이책과 어린이 독자에 대한 것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어찌어찌 일반적인 독서와 연결하며 강연을 이어갔다.

나는 강연 때 청중과 함께 동시 한 편을 외우곤 한다. 동시를 소리 내어 읽고 뜻을 생각하고 외우는 과정이 얼마나 좋은지 같이 느껴보고 싶어서다. 그날의 작품은 윤동주·윤일주 동시집 <민들레 피리>에 실린 짧은 시, ‘개 1’이었다. “눈 위에서/ 개가/ 꽃을 그리며/ 뛰오.”(윤동주). 단 한 문장으로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고, 개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어서 특별히 좋아하는 시다. 외우기도 쉬워서 강연 때 자주 소개한다.

이 시를 읽어 드린 다음 화자가 개를 좋아하니까 개의 발자국도 꽃으로 보이는 모양이라고, 그래서 화자에게 눈밭은 꽃밭이 되었을 것이라고 나의 해석을 덧붙였다. 그리고 모두 함께 소리 내어 읽었다. 그때 맨 앞줄에서 처음부터 열심히 강연을 들으시던 노년 여성께서 눈가에 손수건을 대셨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런데 시를 반복해서 읽고 눈을 감고 외우는 동안 그분은 연신 눈물을 닦으셨다. 애써 못 본 척했지만 나도 따라 눈물이 나서 혼났다.

왜 우셨을까? 남의 사연을 함부로 짐작하면 안 되겠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분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냥 시가 아름다워서 우셨을지 모른다. 최근에 개와 이별하셨다거나, 다른 힘든 일을 겪고 계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눈밭에서 개와 뛰어노는 한 어린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분의 마음속에 동시 한 편으로 불러낼 수 있는 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의 힘도 대단하지만, 동심이라는 것도 어지간히 끈질기다고 생각했다. ‘어린이의 마음’이라는 말뜻 그대로라면 동심은 결코 나약하지 않다.

그나저나 부모님 서랍에서 산타 복장을 발견한 어린이는 이제 동심을 잃게 될까? 어른이 되면 어린이들에게 자기가 알게 된 것을 폭로할까? 어쩌면 산타 복장을 더 꼭꼭 숨기는 어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무심히 산타의 비밀을 흘려버린 어른으로서 면목 없지만, 동심의 힘에 기대를 걸어본다.

▶김소영


독서교실에서 어린이와 함께 읽고 쓰고 배우고 가르친다. 비양육자로서, 돌봄과 교육의 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린이’에 관심이 많다. 어린이에게 좋은 세상이 어른에게도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다. <어린이책 읽는 법> <말하기 독서법> <어린이라는 세계>를 썼다.

김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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