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아우른 강원서 스포츠축제..이 아이들에게 평화를 맡겨봅시다 [김진호의 세계읽기]
[경향신문]
“헐링을 하지 않으면 아일랜드인이 아니다!” 스포츠가 평화의 도구이기는커녕 분쟁의 빌미가 된 곳이 북아일랜드다. 우리에게 생소한 헐링(Hurling)은 아일랜드의 켈트족 전통 스포츠다. 나무막대로 작은 공을 치는 경기로 하키를 연상시킨다. 헐링이 북아일랜드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섬뜩하게 가르는 기준이 된 까닭은 헐링이 아닌, 하키를 하는 ‘적’이 있기 때문이다.
■ 스포츠와 평화, 두 나라 이야기
북아일랜드는 1998년 굿 프라이데이 협정을 맺고 평화의 여정을 시작했지만, ‘평화로운 공존’과는 거리가 멀었다. 협정의 핵심은 인구 비례와 무관하게 권력을 분점하는 공유정신이다. 하지만 가톨릭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민족주의자와 신교도(성공회) 영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통합주의자들은 여전히 분리돼 있다. 뼛속 깊이 분열돼 있기 때문이다. 한마을에서도 다른 동네에 살고, 다른 학교에 다니며, 다른 스포츠를 한다. 아일랜드인 입장에서 헐링과 겔릭 풋볼을 하면 우리편, 하키·럭비·크리켓을 하면 너희편이 된다. 축구는 양측에서 모두 인기가 높은 종목이지만, 서로 응원하는 팀이 달랐다. 겔릭 풋볼은 럭비와 유사하지만, 둥근 공을 사용한다. 정치적 타협을 이뤘다고 해도 주민들 간의 평화는 영원히 불가능해 보이는 공동체다.
설 전 평창평화포럼에 다녀왔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2월 열리는 글로벌 포럼이다. 2017년 말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한반도 상황에서 북한의 선수단·응원단·예술공연단 파견으로 성사된 평화올림픽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게 포럼의 기본 목적이다. ‘스포츠를 통한 평화 증진’을 주제로 지난 8일 열린 세션에서 데이비드 미첼 더블린 트리니티대 벨파스트 캠퍼스 교수가 소개한 ‘북아일랜드 평화 과정에서 스포츠의 역할’이 인상적이었다.
굿 프라이데이 협정 이후 작은 변화는 ‘아이들의 스포츠’에서 시작됐다. 풀뿌리 운동단체인 피스 플레이어가 판을 깔았다. 중립적 종목인 농구에 양측 청소년들을 끌어들였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후 종목을 늘려 나가면서 축구 공동응원까지 발전했다. 이제는 양측 정당 간 관계보다 양측의 종목별 체육협회 간의 사이가 더 돈독해졌다. 화상으로 발제한 미첼 교수는 “스포츠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어떤 평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남영호 신한대 교수는 북아일랜드에서 스포츠의 의미를 ‘평화의 일상적 재생산’으로 요약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종종 다른 나라 사례를 들여다보게 된다. 역사적 맥락과 갈등의 구조는 다를지언정 새로운 아이디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종수 연세대 교수가 소개한 동·서독의 스포츠 교류 사례는 자괴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올림픽과 몇차례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동·서독이 단일팀으로 출전한 경험은 횟수의 차이는 있지만, 그리 새로운 게 아니었다. 남북한이 각각의 국가 대신 ‘아리랑’을 불렀다면, 동·서독은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불렀다. 국기가 문제 됐을 때는 오륜기로 대체했다. 단일팀을 결성하지 못하고 국제대회에서 동·서독 팀이 맞붙을 때면 “우리는 우리와 싸운다(wir gegen uns)”며 자조할 수밖에 없었다.
뼛속 깊이 분열된 북아일랜드
1998년 굿 프라이데이 협정 뒤
청소년 스포츠서 작은 변화 시작
동·서독 교류 사례도 마찬가지
“스포츠가 문제 해결할 순 없지만
평화 과정에서 역할 할 수 있어”
경제 관점의 성인 올림픽과 달리
국제 청소년들을 위한 축제의 장
‘2024 강원’ 유치부터 평화 기획
이름에 도시 아닌 강원 넣은 까닭
‘평화의 일상적 재생산’ 교류 기대
우리와 달리 동족상잔의 경험이 없는 동·서독은 분단 직후인 1946년 ‘작은 스포츠 국경교류’에 합의하고 체육교류를 시작했다. 1961년 베를린장벽 건설 이후 한동안 중단됐다가 4년 뒤 재개됐다. 동·서독 체육회 회장 간에 ‘스포츠 교류 의정서(1972년)’를 체결해 민간이 교류의 주역이 됐지만, 분단정치의 입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단일팀 구성 역시 일회적 이벤트로 흐르기 십상이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동·서독 청소년 간 스포츠 교류였다. 1981년 양독 정상회담에서 청소년 교류 활성화에 합의하면서 특히 스포츠 교류에 중심을 두었다. 그 결과 1987년 서독 학생 2만2000여명이, 다음해엔 2만2681명이 동독을 방문했다.
■ “우리는 우리와 싸운다”
분쟁과 갈등의 양 당사자가 마음과 마음을 나눌 공간을 마련하지 못할 때 스포츠는 그 플랫폼이 된다. 성인보다는 청소년 스포츠 교류의 문이 더 쉽게 열릴 수 있으며, 더 지속적이다. 평창평화포럼을 준비한 평창기념재단 측이 스포츠를 통한 평화 증진 세션을 마련한 까닭은 이번 포럼의 가장 큰 주제가 2024 강원 동계 청소년올림픽(YOG)이기 때문이다. 같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주최하지만, 성인 올림픽의 성공 여부가 투자와 경제 개념으로 환산된다면, 15~18세 선수들이 참가하는 YOG의 기본원칙은 ‘청소년을 위한, 청소년과 함께하는, 청소년에 의한(For, With, and By Youth)’ 대회이다. 경쟁과 배움 및 경험의 공유가 중요하다. 유럽 지역대회는 이름 자체가 ‘축제(유럽청소년올림픽축제)’이다.
IOC가 조직한 하계 YOG는 2010년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4년마다 열려왔다. 난징(2014), 부에노스아이레스(2018)로 이어졌으며 2026년 세네갈 다카르에서 열린다. 강원 동계대회는 인스브루크(2012), 릴레함메르(2016), 로잔(2020)에 이어 4번째 대회가 된다. 아시아에서 처음 열린다. 평창포럼에 화상으로 실시간 참가한 비르지니 파이브르 로잔 대회 조직위원장은 “YOG를 혁신을 위한 연구소로 여겼다. 청소년들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것이 대회(유치)의 큰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강원도가 2024 동계 YOG를 유치한 것은 작년 1월이지만 한 해가 넘도록 국내에서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평창포럼에선 대회조직위의 홍보 부족을 탓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게 나왔다. 하지만 사교육 부문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함을 남긴다. 세계 아이들이 교류할 기회를 마련해놓고도, 정작 주최국이 ‘글로벌 공교육 축제’의 기회를 못 보는 근시안임을 확인시켜 주는 증좌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강원 2024’의 의미는 통상적인 YOG에 그치지 않는다. IOC와 강원도는 유치 단계에서부터 ‘평화’를 함께 기획했다.
■ ‘청소년을 위한, 청소년과 함께하는, 청소년에 의한 올림픽’
우선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 대회 이름에 개최 도시가 아닌, ‘지방(道)’을 넣었다. 포럼 개막식에 온라인 축사를 보낸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은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성취한 평화정신의 계승을 강조했다. 대회 명칭에 ‘강원’을 넣음으로써 자연스레 남북 강원도가 모두 참가하는 대회로 이끌자는 의도였다. 북측이 공동개최에 응한다면, 남측 강원도 한 도시(강릉·정선·평창 중 1곳)와 북측 강원도 원산이 개막식과 폐막식을 나눠 열 수도 있다는 게 IOC와 강원도의 입장이다.
최문순 강원지사(사진)는 포럼 마지막 날인 9일 “대회장부터 남의 강원지사와 북의 강원도당 위원장이 맡아 IOC와 대회 공동계약자가 되자”면서 ‘2024 강원’의 남북 공동개최를 공개 제안했다. 북은 물론, 남에서조차 별다른 반향을 받지 못한 제안이다. 지역 언론에서 반짝 주목을 받았을 뿐이다. 남북관계는 2019년 2월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동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국 간 회담은 물론 민간 교류도 단절됐다. 작년 초 코로나19의 대확산이 재개를 더욱 어렵게 해왔다.
YOG의 공동개최는 단순한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2020 로잔 대회의 경우 79개국에서 선수만 1788명이 참가했다. 관계자들까지 포함하면 그 몇배의 손님들이 찾는다. 2024년 대회까지 남은 시간은 3년. 그사이 온갖 대회 준비 과정을 함께하자는 게 강원도의 염원이다. 이를 계기로 남북 강원도가 운동장에서나마 통일을 경험하고 싶은 것이며, 지속 가능한 청소년 체육교류로 살려 나가고 싶은 것이다.
■ ‘2024 강원’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
분단정치의 장벽을 넘어 청소년들이 같은 그라운드에서 같은 공을 다퉜던 경험은 남북 간에도 있다. 2018년 10월 춘천 대회까지 5차례 열렸던 아리스포츠컵 국제유소년축구대회가 그것이다. 1회 대회(2014)는 북측 선수단이 포격전이 벌어졌던 연천을 찾았고, 2회 평양 대회(2015)는 목함지뢰 사건으로 북측이 선언한 ‘준전시상태’에서 치러졌다. 중국 쿤밍에서 3회 대회를 치른 뒤 2018년엔 평양(4회)과 춘천(5회)을 오가며 열렸다. 특히 2015년 8월 평양 대회는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과 겹쳤다. 대회를 이끌어온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은 “경기 개막 당일 새벽까지 개최 여부가 불투명했지만, 극적으로 열린 개막식에 김일성경기장을 꽉 메운 관중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4월5일 ‘평화경제 비전전략 보고회’에서 “국제유소년축구대회는 남북관계가 단절된 시기에도 중단되지 않고 이어온 대표적인 평화교류사업”이라고 평가한 까닭이다.
2018년엔 남북 15세 이하 청소년 선수들이 각각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이용해 경기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2019년 원산 대회(6회)는 어른들의 정치에 치이고, 코로나19가 겹치면서 2년 넘게 표류하고 있다. 그사이 분단정치는 스포츠를 또 망쳤다. 북측은 2019년 10월1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남북한의 카타르 월드컵 지역예선 경기를 무관중으로 열게 했다.
이번엔 성인 스포츠도 아니고 아이들 스포츠다. 아이들이 함께 공 좀 차겠다는데, 얼음 좀 지치겠다는데 언제까지 막을 것인가. 체육사를 뒤지다가 발견한 오래전 연설문의 한 단락을 당시 표기 그대로 전한다. 독립투사이자 체육인이었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1936년 9월10일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는 조선인 선수들을 환송하며 한 말(월간 삼천리)이다.
“이 청년선수들에게 천하를 맛겨봅시다. 받다시 하놀 공중 놉히 공을 차 던지듯 천하를 잘 운전하여갈 것입니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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