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어느 야구팬의 힘겨운 겨울나기 / 배정한

한겨레 2021. 2. 19.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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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없는 계절, 야구팬들에게 겨울은 지루하다 못해 삭막하다.

그런 영상은 야구 특유의 유장한 리듬을 뭉텅 잘라내고 짜릿한 액션만 압축한다.

야구를 본다는 건 세 시간 넘게 리듬을 타며 오르고 내리는 긴장감을 즐기는 행위다.

야구가 재개될 따뜻한 봄이 오면 감염병에 움츠러든 일상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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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창원엔씨(NC)파크, 거리에서 바로 걸어 들어가 경기를 조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 사진 주신하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야구 없는 계절, 야구팬들에게 겨울은 지루하다 못해 삭막하다. 오죽하면 자유계약(FA) 선수의 수십억 계약 기사에, 불의의 부상을 당한 선수의 연봉 삭감 뉴스에 내 일처럼 일희일비하겠는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야구가 그리운 날이면 나는 인상적이었던 경기의 기록지를 구해 기호로 치환된 경기 과정을 머릿속 영상으로 복기하며 마음을 다독인다. 기록지는 규칙이 엄정한 텍스트여서 몇 번만 훈련하면 영상화가 어렵지 않고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요즘은 호쾌한 ‘빠던’(배트 던지기)이나 신기의 다이빙 캐치 장면들만 모아놓거나, 긴장감 넘치는 벤치클리어링(몸싸움)이나 황당한 실수 장면들만 이어붙인 눈요깃거리가 차고 넘친다. 한 경기를 10분 안팎으로 편집한 ‘하이라이트’를 언제든 다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두 번은 몰라도, 그게 야구를 보는 건 아니다.

야구는 진기명기나 하이라이트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런 영상은 야구 특유의 유장한 리듬을 뭉텅 잘라내고 짜릿한 액션만 압축한다. 축구의 단독 드리블이나 농구의 덩크슛과 달리 야구에서는 멋진 플레이가 승부를 결정짓는 경우가 거의 없다. 9회말 2사 만루 절박한 위기를 삼진으로 벗어날 때 탄성이 터지는 건, 관념적으로 긴박감을 느끼기 때문이지 그 장면이 물리적으로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모든 타구가 포물선을 그리며 펜스를 넘어가거나 야수가 매번 몸을 던져 공을 잡아내는 경기는 없다. 야구를 본다는 건 세 시간 넘게 리듬을 타며 오르고 내리는 긴장감을 즐기는 행위다.

야구는 투수의 1회 첫 투구부터 타자의 9회 마지막 죽음까지 숨죽이며 지켜봐야 이해할 수 있는 경기다. 그래서 춤추며 노래하는 ‘직관’(직접 관전)보다 티브이(TV) 시청이 낫다는 의견도 있다. 티브이는 가장 좋은 각도로 중요한 순간을 클로즈업해준다. 투수의 미세한 손동작과 타자의 표정까지 잡아낸다. 화면을 분할해 타자의 스윙과 주자의 도루를 동시에 보여준다. 슬로모션으로 투구 궤적과 타구 궤적까지 분석해낸다.

그렇지만 티브이 야구와 직관 야구의 장단점을 둘러싼 토론은 탕수육계의 ‘찍먹-부먹’ 논쟁 이상으로 치열하다. 직관의 가장 큰 매력은 필드 전체를 통찰하는 시야와 생동하는 현장의 분위기다. 1982년의 무더운 여름밤, 세계선수권 한일 최종전, 2 대 0으로 끌려가던 8회말 2사 1·3루, 왼쪽 폴대를 맞히는 한대화의 대역전 홈런이 터진 순간의 함성. 직관을 했던 나는 지축의 흔들림을 온몸으로 느꼈다. 영상만으로는 역동의 현장이 전달되지 않는다.

거대한 노래방, 사직야구장. 사진 배정한

직관의 또다른 매력은 야구장 디자인의 다양성에 있다. 놀랍게도 야구장은 규격이 제각각이다. 베이스 간 거리를 비롯한 내야의 규격은 격자형 도시의 블록 크기처럼 일정하지만, 외야의 넓이, 펜스 높이와 재질은 야생의 자연처럼 변화무쌍하다. 도시(내야)와 자연(외야)이 만나 다양한 변주를 펼친다. 미국 보스턴 펜웨이 파크 왼쪽 펜스는 높이가 11m여서 ‘그린 몬스터’라 불린다. 롯데의 10승 투수 린드블럼은 광활한 잠실야구장을 쓰는 두산으로 옮긴 뒤 20승 투수로 발돋움했다. 별명이 ‘탁구장’인 모 구장은 홈런타자의 천국이다. 창원엔씨(NC)파크는 도시 가로와 외야 상단의 높이가 똑같다. 거리에서 바로 걸어 들어가 경기를 조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다.

야구가 재개될 따뜻한 봄이 오면 감염병에 움츠러든 일상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설문지를 받았다. 코로나가 끝나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마스크 벗어던지고 친구들과 야구 직관하며 생맥주를 들이켜야죠. 한 줄 더 붙였다. 관중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스탠드에 홀로 앉아 한편의 연극 같았던 지난해를 되돌아볼래요.

생동하는 야구장. 사진 주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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