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 동참 호소 목소리' 전옥주씨 5·18 민주묘지 안장

변재훈 2021. 2. 19.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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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고초를 겪고도 꿋꿋이 살았는데하늘이 원망스럽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 참여를 호소하는 길거리 방송을 통해 항쟁을 이끈 전옥주(전춘심)씨의 유해가 19일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됐다.

항쟁 당시 고인과 함께 광주 도심 곳곳을 돌며 시민 참여 호소 방송을 함께 한 박영숙씨, 차명숙씨도 이날 안장식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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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 초기 나흘간 가두방송 참여, '범시민 항쟁 확산' 기여
수감 뒤 모진 고문 받아 후유증 시달려..유족·동지들 '비통'
"평생 고통에도 진상 규명·왜곡 바로잡기 앞장..뜻 잇겠다"
[광주=뉴시스] 변재훈 기자 = 19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 2묘역에서 전옥주(전춘심)씨 유해 안장식이 열린 가운데 유족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전씨는 5·18 당시 시민 참여를 호소하는 가두 방송으로 항쟁을 이끌었다. 2021.02.19. wisdom21@newsis.com


[광주=뉴시스] 변재훈 기자 = "모진 고초를 겪고도 꿋꿋이 살았는데…하늘이 원망스럽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 참여를 호소하는 길거리 방송을 통해 항쟁을 이끈 전옥주(전춘심)씨의 유해가 19일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됐다.

5·18기념재단과 5·18 3단체(부상자회·유족회·구속부상자회) 등은 19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전옥주씨 유해 안장식을 열었다.

안장식은 고인에 대한 경례, 하관, 허토, 묵념,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 순으로 진행됐다.

유족과 항쟁 주역인 5·18민주유공자들은 전옥주씨의 유해와 영정을 번갈아보며 비통함에 잠겼다. 유족들은 안장을 마친 묘 앞에 무릎을 꿇고 오열하거나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며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5·18부상자회 이지윤 전 사무총장은 추모사를 통해 "이 무슨 청천벽력의 비보란 말입니까. 이렇게 황망하게 보내 드려야만 한단 말입니까. 한 많은 세월 참으로 길었을 것이다. 꽃처럼 아름답고 젊은 날, 평범했던 고인은 무자비한 계엄군의 만행 앞에서 정의롭고 위대하셨다"고 밝혔다.

이어 "건강이 허락하는 한, 5·18 왜곡 규탄 집회를 찾아다니던 모습을 기억한다. '오월정신 잊지 말아주세요!' 라고 안간힘을 다해 외쳤던 그 음성 아직도 생생하다"며 "먼저 간 동지들 곁에서 고문 후유증 없는 그곳에서, 이 생에서 겪은 가슴 시린 기억은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평안히 영면하소서"라고 했다.

[광주=뉴시스] 변재훈 기자 = 19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 2묘역에서 전옥주(전춘심)씨 유해 안장식이 열리고 있다. 전씨는 5·18 당시 시민 참여를 호소하는 가두 방송으로 항쟁을 이끌었다. 2021.02.19. wisdom21@newsis.com

항쟁 당시 고인과 함께 광주 도심 곳곳을 돌며 시민 참여 호소 방송을 함께 한 박영숙씨, 차명숙씨도 이날 안장식에 참석했다.

박씨는 "항쟁 초기부터 용감하게 나서서 가두 방송을 한 고인을 또렷히 기억한다. 항쟁 당시엔 서로 알지 못했지만, 505보안대와 경찰서를 오가며 모진 고문과 조사를 받으며 정서적으로 크게 의지했던 언니였다"며 "옥살이를 하며 언니가 '어쨌든 살아서 다시 만나자'는 말에 고통을 견뎠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언니가 좋은 곳으로 가서 그 곳에선 꽃길만 걷길 바란다. 언니의 뜻을 이어나가, 아직 풀어야 할 진상 규명 등의 남은 일을 산 자들이 잘 하겠다"고 다짐했다.

차씨도 "체포 직후 간첩으로 몰려 이루 말할 수 없는 매질과 고문 속에서도 꿋꿋이 버텼다. 매에 맞은 온 몸의 피멍이 제대로 아물기도 전에 겨울철 옥살이를 했으니 일 평생 지병을 안고 살았다. 5·18 당시 참상을 널리 알리고 책임자 처벌까지 하려면 갈 길이 먼데도 동지가 먼저 가니 허망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광주=뉴시스] 변재훈 기자 = 19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 2묘역에서 전옥주(전춘심)씨 유해 안장식이 열린 가운데 유족들이 허토를 하고 있다. 전씨는 5·18 당시 시민 참여를 호소하는 가두 방송으로 항쟁을 이끌었다. 2021.02.19. wisdom21@newsis.com

서울에서 살던 전씨는 31살 되던 해인 1980년 5월 광주의 친척집을 방문했다가 항쟁에 동참했다.

전씨는 당시 5월18일부터 나흘간 광주 도심 곳곳을 돌며 길거리 방송을 통해 "시민 여러분, 형제 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도청으로 나와 형제자매들을 살려주십시오"라고 외치며 항쟁 참여를 독려했다.

그의 길거리 방송으로 대학생 중심의 시위가 범시민적인 항쟁으로 확산, 발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2018년 제38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는 영화 '화려한 휴가' 속 장면과 함께 전씨의 항쟁 당시 역할이 소개됐다. 전씨는 추모 공연에 직접 출연, 당시 거리 방송을 재현했다.

전씨는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를 앞두고, 시민대표 5명에 포함돼 당시 전남도지사와 만나 계엄군 철수를 요청하기도 했다.

다음 날인 5월22일 전씨는 계엄군에게 붙잡혀 징역 15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면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당시 겪었던 고문으로 전씨는 평생 정신적으로 큰 후유증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듬해 4월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전씨는 1989년 국회에서 열린 광주청문회 증인으로 출석, 항쟁 참상을 알리기도 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wisdom21@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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