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로 부활한 항일투쟁 女전사들
■ 윤석남, 학고재서 개인전
영화 ‘암살’ 실존 모델 남자현
비행사 권기옥·신채호 부인…
14人의 대형 채색화 한자리서
“더 발굴해 100명까지 그릴 것”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화를 보러 가며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미리 엄숙한 마음을 챙겨가야 할 듯 싶었다.전시장의 작품들을 둘러보며 그런 압박감이 달아나는 걸 느꼈다. 크고 환한 빛이 가슴에 스며왔기 때문이다.
지난 17일 서울 삼청동 학고재 전시장에서 만난 윤석남(82·사진) 작가는 그 환한 느낌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공감했다. “작품을 만들며 너무 즐거웠어요. 채색화가 우리 한국인에게 맞는 모양이에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그림을 그렸거든요. 작가는 작품을 하며 고민해야 하는데, 좀 그렇죠, 하하.”
윤 작가가 오는 4월 3일까지 여는 전시의 제목은 ‘윤석남: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이다. 남녀 차별이 엄존하던 시대에 주체적 여성으로 목숨을 내걸고 독립운동을 했던 14명의 초상을 만날 수 있다.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 모델이었던 남자현(1872~1933), 비행사 권기옥(1901~1988)처럼 이름이 알려진 인물도 있으나 대개는 낯설다.
남성 위주로 쓰인 독립운동사 속에 가려진 여성 인물들을 조망하자는 게 이번 전시의 취지다. 소설가 김이경은 전시 제목과 똑같은 제목으로 책을 펴내 그들의 생애를 기린다. 윤 작가는 “앞으로 100명까지 그리고 싶다”고 했다.
전시장 맨 앞에 걸려 있는 박자혜(1895~1943) 초상은 남편인 단재 신채호의 유해 상자를 들고 있다. “슬픔을 참으며 분노하는 표정을 상상하며 그렸다”는 게 윤 작가의 설명이다. 중앙에 있는 김마리아(1892~1944)는 마치 만세를 부르는 듯한 모습이다. 윤 작가는 “일본 경찰이 신문할 때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대답한 선생의 진취적 몸짓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대갓집 딸로 태어나 독립운동에 뛰어든 정정화(1900~1991)와 기생 출신으로 근우회를 창립한 정칠성(1897~?)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게 이번 전시의 묘미다.
14명의 대형(210×94㎝) 채색 초상화 옆엔 실제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연필 드로잉 작품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그들의 생전 발언, 혹은 그들에 대한 주변 사람의 증언도 글로 적어서 붙여놨다. 이 글들을 읽어보면, 남녀 차별이 극심했던 시대에 살았던 여성 선각자들이 항일 투쟁을 여성해방 운동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전시장 안쪽엔 설치 작품 ‘붉은 방’이 자리하고 있다. 붉은색 종이 콜라주와 나무 조각 작품이 어울려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흘린 피를 되새기면서도 조국에 헌신한 그들의 평안한 얼굴을 그리고 싶었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알려진 것처럼, 윤 작가는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40세가 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여성 주체의 삶을 담아내는 작품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거장 반열에 올랐다. 그는 2011년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나의 뿌리를 알고 싶었지요. 동양화 기법으로 하는 채색화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서양 재료를 모두 버렸습니다.”
평생 서양화 어법으로 작업해 온 작가가 70세가 넘어 채색화에 도전한다는 것은 우리 미술계에서 전례 없는 일이다. “채색화를 10년 정도 그려왔지만 아직 첫 계단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윤 작가는 이렇게 겸허하게 말했으나, 그를 연구해 온 김현주 추계예대 교수는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김 교수 말에 수굿이 동의한 것은, 이번 채색 초상화들에서 환한 빛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민족과 국가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는 작품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 이는 원로 작가의 ‘젊은 도전’이 빚어낸 성취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깨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는 점에서 윤 작가와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닮았다.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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