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이동 무대 '더 윙'의 힘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前 예일대 교수
콘서트 트럭 타고 전국 순회
팬데믹시대 가장 안전한 연주
최대 수혜자는 오히려 연주자
문화 전령사로서의 사명 자각
받은 사랑 그대로 전달하는 것
인류 역사 최고 아름다운 순간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황지중앙초등학교에 들어서면 이 학교 동문인 2002년 월드컵 주역 이을용 선수의 동상이 품위 있게 자리 잡고 있다. 2014년 봄, 태백에서의 연주 후 조기축구단과 게임을 하기 위해 찾은 이 학교 운동장은, 이을용 선수 외에도 학교를 병풍처럼 포근하게 에워싸고 있는 야산들이 반겨주고 있었다.
동행했던 클래식기타 주자는 한사코 축구와는 거리가 멀다며 운동장 한구석에서 연습하겠다고 점잖게 자리를 잡는다. 유감스럽게도, 이 기타 주자가 연습하는 아란후에스 협주곡 소리에 신경을 빼앗겨 몇 차례의 결정적 득점 기회를 놓쳤지만, 이날 경험은 새로운 연주 형태의 대장정을 알리는 반전이 됐다.
연주(축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뒤 경기 내내 스며들던 기타 소리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교한 어쿠스틱기타 소리가 확성 장치도 없이 어떻게 운동장 전체에 촘촘히 퍼질 수 있었을까? 나름대로 추정한 답은 뜻밖에도 단순하다. 콘서트홀 내부의 주재료는 목재다. 실내의 벽과 무대 그리고 바닥을 잘 어울리는 목재로 꾸며 양질의 음향을 지닌 연주회장을 이룬다. 나무숲을 건물 안으로 옮겨 놓은 듯하다고 할까? 한 마리 새가 부르는 노래가 산 전체에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것은, 새의 소리가 크기 때문이라기보다 새의 노래를 받아주고 다시 돌려주는 우아한 숲이 있기 때문이다. 운동장에 촘촘했던 기타 소리도 학교를 둘러싼 야산의 매혹적인 공명 덕분이었다.
그해 여름, 전국은 지방선거 열기로 뜨거웠다. 작은 트럭 위에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연출되는 축제 분위기에 눈길이 꽂혔다. 집 근처 서울 약수역 주변에 나타난 유세 트럭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몇 주 전 태백 방문 이후에 품어 온 상념들이 차분히 정리돼 갔다.
#1. 눈앞의 유세 트럭에서 현란한 춤판이 벌어지고 연사들이 사자후를 토한다.
#2(가상이다). 스위치를 누르면 대형 윙보디 트럭이 금방 콘서트 무대로 바뀌고 무대에 열정적인 음악이 흐른다.
순간, 현재와 미래의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절묘하고 선명하게 실제적 이미지로 그림이 그려졌다. 환상적인 음향을 가진 천연 콘서트홀의 탄생 가능성이 내 가슴을 고동치게 했다. 아무런 연주 시설이 없는 지역을 찾아가 오케스트라 선율을 들려주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 앞에 구체적 솔루션이 나타난 것이다.
다음 단계는 트럭 제작! 귀한 꿈을 함께 실현할 후원자를 찾아 나섰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에 주저하지 않는 선한 이웃이 나타났다. 작업 구상 4개월 만인 이듬해 1월. 세계 최초, 4.5t 트럭의 오케스트라 콘서트홀이 예상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졌을 때, 내 눈물은 멎을 줄 몰랐다. 차량 옆면이 새의 날개처럼 펼쳐지는 화물차가 윙보디 트럭 아닌가! 콘서트 트럭의 이름 ‘더 윙(The Wing)’ 또는 ‘날개’는 여기에서 나왔다. 더 새로운 모델의 ‘더 윙’이 계속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더 윙’은 고유명사 아닌 일반명사가 돼야 한다.
예술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 숨 쉬어야 한다. 사막에서도 꽃 피우는 선인장, 추운 겨울을 겪어야만 한다는 천리(天理)를 알고 있는 달맞이꽃과 같은 혼을 가꾸는 게 예술가의 사명이다. 마침내, 2015년 3월. ‘더 윙’은 대행진을 시작했다.
△정신병원 주차장에서 연주 후 푸치니의 아리아를 부르며 쫓아다니던 환자 △연주자가 청중보다 훨씬 많았지만, 이전에 느낄 수 없던 감동이 흐르던 국립소록도병원 △청중과 연주자 모두 눈물과 콧물이 범벅돼 ‘고향의 봄’을 부르던 탈북자 교육시설 하나원 △2016년 가을, 청중이 연주자 코앞까지 다가와 록 콘서트 분위기를 연출한 첨성대 앞의 경주 시민들 △무대 위로 올라와 짜릿한 오케스트라의 전율을 느끼고 싶어 줄 서던 3사관학교 생도들 △쏟아지던 비가 연주시간이 되면 멈추던, 기적의 장마철 제주도 순회연주.
그 밖에도 교도소·병원·군부대·노숙자쉼터·소년원과 각종 학교, 남해·여수·울산·인천·천안·부산·동두천·삼양동·정릉·세종시 등 전국의 크고 작은 마을을 다니며 더 윙의 날개를 펴고 접고 다시 펴서 전국을 달려왔다. 더 윙은 험난한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시대에 가장 안전한 연주 형태다. 올해도 쉬지 않고 달린다. 기쁜 마음과 정성 가득한 음악을 싣고 흔쾌히. 흥미롭게도, 더 윙의 최대 수혜자는 연주자다. 문화 낙후 지역에서의 연주를 통해 문화 전령사의 사명을 자각한다고 고백한다. 연주자들이 받는 힐링과 구체화하는 꿈의 크기는 참으로 어마어마하다.
인류 역사의 아름다운 순간들은 받은 사랑을 조건 없이 남에게 전하는 일에 충실했던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에게 전하라(Pass it on)’는 그렇게 살아온 선배들이 세상을 향해 조용히 남기고 간 메시지다.
온 세계가 두려움과 불확실 속에 살고 있다. 척박해진 비대면의 일상에서 당분간은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과연 우리는 다음 세대에 무엇을 전할 것인가? 그것은 꿈이다. 현실은 꿈에서 비롯된다. 꿈이 없으면 현실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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