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칼럼] 스포츠 민족주의에서 스포츠 민주주의로
선배가 후배 괴롭히는 풍토, 성적 만능 한국 사회 축소판
올림픽 메달 휩쓴다 해도 민주적 건강성 없으면 후진국
스타 선수들의 학교 폭력 논란이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여자 배구 이재영·이다영 쌍둥이에서 시작한 학폭 파문이 남자 배구 송명근·심경섭 선수로 번졌다. 소속 프로팀은 이들을 무기한 출전 정지시키고 대한배구협회는 국가대표 자격까지 박탈했다. 심각한 인권 유린이자 불법행위인 학폭을 근절하려면 일벌백계가 불가피하다. 체육계 인권 보호 방안을 담은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일명 최숙현법)이 오늘부터 시행되지만 그것만으론 불충분하다. 여론 재판을 넘어 현실을 개혁하려면 스포츠 민족주의에서 스포츠 민주주의로 정책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폭력과 괴롭힘이 만연한 체육계의 현실은 성적 만능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학생 선수들은 운동만 잘해도 명문대에 가고 돈과 명예가 따르는 프로 선수와 국가대표를 꿈꿀 수 있다. 성적 지상주의는 경기력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지도자가 선수를 때리고 선배가 후배를 괴롭히는 풍토를 낳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합숙 생활로 언어 폭력과 신체 폭력에 노출된 선수들은 폭력을 내면화한다. 공부와 인성 교육을 포기한 학생 선수들을 ‘운동 기계’로 키우는 관행은 스포츠 폭력의 온상이다. 이렇게 험난한 과정을 거쳐도 프로나 국가대표로 ‘성공’하는 선수는 소수에 불과하다. 승자 독식의 엘리트 체육 체제에서 탈락한 학생 선수들은 졸업 후 사회 적응에 심각한 문제를 겪는다.
한국 스포츠는 국가 중심의 스포츠 민족주의와 엘리트 체육 체제로 움직여왔다. 극소수 체육 영재들을 선수촌에서 집중 조련해 애국심 제고와 국민 통합에 동원하는 국가대표 상비군 제도가 그 산물이다. 우리가 체육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국가 체육 시스템이 결정적이었다. 한국이 개발도상국이던 시절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길러진 체육 꿈나무들의 활약이 국위를 선양한다고 우리는 믿어 왔다. 하지만 이젠 스포츠 민족주의의 국가 체육 중시 정책을 넘어 시민들이 일상에서 운동을 즐기는 스포츠 민주주의를 실천할 때다.
국가 주도 엘리트 체육 강국 러시아나 중국이 올림픽 메달을 휩쓸어도 선진국으로 간주되진 않는다. 민주국가에선 국가가 주체가 된 엘리트 체육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생활체육을 향유하는 스포츠 민주주의가 발전한다. 선진국일수록 국민이 쉽게 이용 가능한 동네 잔디 축구장이나 실내 수영장, 소규모 체육관 같은 생활 체육 시설이 곳곳에 있다. 학창 시절부터 스포츠를 통해 협동심과 리더십을 기르는 스포츠 민주주의를 삶의 현장에서 실천해야 선진 시민이다.
운동과 스포츠가 일상생활 한가운데로 자연스레 녹아드는 게 스포츠 민주주의의 건강한 삶이다. 우리도 국가주의적 스포츠 민족주의를 넘어 운동 자체가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초·중·고 교육에서 일반 학생들을 위한 체육 활동 기회도 크게 늘려야 한다. 학생 선수들의 인권과 학습권을 보장하려면 이들을 ‘운동 바보’로 만들면서 폭력을 대물림하는 합숙 생활부터 혁파해야 한다. 프로 선수나 국가대표 선수들도 ‘즐기면서’ 운동하는 스포츠 민주주의 사회가 열린 사회다.
프로 스포츠는 자본의 논리 위에서 작동하는 경쟁 게임이며 선수 실력과 수입이 동행하는 승자 독식의 세계다. 그럼에도 평생 가꾼 절정의 기예(技藝)로 각본 없는 드라마를 써나가는 선수들의 땀방울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단체 경기인 배구에서는 공격이나 수비에 성공했을 때 선수 모두가 환호하며 서로를 응원하고 실수한 동료를 격려한다. 1세트에 25점을 먼저 내야 승리하므로 5세트까지 가는 접전이라면 한 경기당 수백 번씩 작은 기쁨의 세리머니가 펼쳐진다. 행복의 비밀이 소소한 즐거움을 자주 맛보는 데 있다는 통찰을 감안하면 배구 경기 자체가 작은 기쁨을 양산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선수들의 웃는 얼굴과 생동감 넘치는 동작들, 칭찬의 몸짓이 모여 긍정의 에너지를 전파한다. 작전타임 때 질책보다는 선수들을 격려하는 감독들의 태도도 인상적이다. 배구의 스포츠맨십은 학폭 파문이 강타한 체육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교훈을 준다. 활짝 웃는 얼굴과 상호 존중, 스포츠 정신에 기초한 팀 플레이가 한국 사회에서 희귀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배구선수들이 시합에서 선보이는 멋진 협업과 격려를 평상시 훈련 과정에서도 실천해야 학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서로를 존중하면서 운동의 기쁨을 누리는 시민들이 스포츠 민주주의의 주권자다. 정정당당한 스포츠맨십이야말로 삶을 빛나게 하는 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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