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84] 어느 판사의 죽음
1947년 11월 일본 신문에 한 판사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가 게재된다. 판사의 이름은 야마구치 요시타다(山口良忠). 34세의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의 사인은 영양실조였다. 전쟁 직후 식량 부족이 심각하던 시절이기는 했지만, 지체 높은 판사가 아사(餓死)했다는 소식에 일본인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당시 일본은 ‘식량관리법’에 따라 쌀⋅밀가루 등 주요 식료품을 배급제로 운용하고 있었다. 겨우 연명할 정도의 식량 배급에 시중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고, 정부의 단속을 피해 암시장이 독버섯처럼 생겨났다. 현실과 동떨어진 규제와 암시장 거래로 식량의 정상적인 유통이 더욱 왜곡되자 정부는 엄정한 불법 유통 단속을 엄포했지만, 암시장은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야마구치는 1946년부터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경제사범을 담당하고 있었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식량관리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사람들이 넘쳐났고, 야마구치는 그들을 법의 이름으로 심판해야만 했다. 부인에 따르면 야마구치는 그해 10월 배급 이외의 어떠한 음식도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타인에게 암시장 이용의 죄를 물어야 하는 자신이 암시장 유통품을 소비하는 것은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며 자신은 판사로서 부끄러움 없는 재판을 하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게 배급으로만 끼니를 때우던 야마구치는 이듬해 8월 영양실조로 쓰러졌고, 요양 중 폐질환이 악화되어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야마구치 판사의 죽음은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다. 융통성 없는 고집이 비인간적이라며 혀를 차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그러나 타인을 심판하는 재판관으로서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거짓과 위선을 경계하고자 한 그의 고결한 정신은 일본 사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지금도 사법부의 신뢰를 지탱하는 교훈으로 회자되고 있다. 물리력이나 금력이 없는 사법부가 정의의 수호자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신뢰가 생명이다. 그리고 그 신뢰는 정직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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