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語西話] 영원히 변치 않는 선비의 절개, 百世淸風
이 땅에서 내로라하는 유력 가문의 서원과 종갓집 그리고 정자를 공부 삼아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언젠가 경북 안동에 있는 학봉종택을 찾았을 때 필자의 사가(私家) 중시조 어른인 대소헌 조종도(1537~1597) 할아버지(이하 모두 존칭 생략)에 관한 기록을 만난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남의 집에 잘못 배달된 우리 집 편지를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손에 쥔 느낌이랄까? 절집으로 출가한 이후 잊었던 우리 가문의 흔적도 가끔 찾아봐야겠다는 사명감이 마음 한구석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그때가 2019년 2월이었으니 두 해 만에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킨 셈이다. 설 연휴를 이용하여 경남 함안 일대를 찾았다. 조씨 문중이 지역의 가장 큰 성씨로서 세거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어계고택과 서산서원 그리고 채미정을 답사 목록에 올렸다.
조선 초기에 단종과 세조의 인위적 왕위 교체라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낙향을 선택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생육신(生六臣)이라고 불린 어계 조려(漁溪 趙旅·1420~1489)의 꼿꼿함은 채미정(菜薇亭)이라는 소박한 정자 이름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채미는 고사리를 말한다. 고대 중국의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지조 있는 삶을 지탱해준 유일한 먹거리가 고사리였다. 이후 고사리는 선비의 절개를 대변하는 언어로 자리매김되었다. 게다가 이 정자는 위치마저 한갓진 곳이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작은 언덕에 기댄 채 평지에 숨은 듯이 앉아 있다. 작은 공간에 불과하지만 어계고택과 서산서원을 동시에 아우르는 중심 혈(穴)자리라고 하겠다. 그래서 대원군이 서원을 멸실케 했을 때도 얼마간 거리를 두고서 떨어져 있었기에 무탈했다. 이뿐만 아니라 사라진 서원의 기능까지 떠맡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정자 중앙에 자리 잡은 채미정 현판 좌우에 두 글자로 된 ‘백세(百世)’와 ‘청풍(淸風)’이라는 큰 글씨 현판을 양쪽으로 달고 있다는 점이다. 간판 격 본문인 ‘채미’에 붙인 해설인 셈인데 해설이 본문보다 더 큰 면적을 차지한 것이 매우 생경하다. 백세청풍(百世淸風)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맑고 높은 선비의 절개’라는 의미로 조선 사대부의 지조를 의미하는 상징어다. 이 글씨의 원본은 송나라 주자(朱子·1130~1200)가 백이숙제 사당에 남겨 둔 것이다. 조선 중기 정윤목(1571~1629)은 19세 때 중국 사신인 아버지 정탁(1526~1605)을 따라가다가 만난 이 글씨에 감동하여 실물 그대로 베껴왔다. 너무 흡족한 나머지 자신의 호를 청풍자(淸風子)라고 할 정도였다. 좋은 것은 나누기 마련이다. 이후 예천 삼강강당을 필두로 함안 채미정, 금산 청풍서원. 함양 일두고택 등에도 같은 현판을 걸었다.
귀한 글씨인지라 목재로 만든 현판은 여러 곳으로 나누어 둔다고 할지라도 못 미더웠다. 보존이 목적이라면 금석에 새겨야 한다. 그래야 안심이 되었는지 서울 인왕산 바위에도 누군가 ‘백세청풍’을 새겼다. 한문 대장경도 멸실을 우려하여 7세기 무렵 일만오천 장의 돌판에 새긴 방산석경(房山石經)이 중국 베이징 인근 운거사(雲居寺)에 보관되어 있다. 조려의 호인 어계(漁溪·계곡에서 고기를 잡다)라는 글자처럼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보낸 개울가 ‘고바위’ 절벽에도 후손인 조삼규(趙三奎)가 큰 글씨로 ‘백세청풍’을 새겼다. 문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정신까지 영원히 후세에 전해지길 바라면서 아래쪽에 작은 글씨로 4행의 헌시까지 함께 새긴 뒤 멀리서도 잘 보이라고 하얗게 덧칠까지 했다.
어조등임일(漁祖登臨日) 어계 할아버지께서 낚시를 오시는 날이면
계산청복청(溪山淸復淸) 계곡과 산이 푸르름을 더하는구나.
후생수불앙(後生誰不仰) 후학이라면 누군들 우러르지 않으리오.
백세수풍성(百世樹風聲) 맑은 바람 소리는 백세토록 영원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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