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쑥
[경향신문]
봄은 봄나물이다. 설 지났다고 추위가 가실 리 없다. 꽃샘추위가 남아 있음을 모두 잘 안다. 그래도 사뭇 길어진 해 아래 새싹이 언뜻 비치고 나면 삽시간에 봄이 번질 테다. 아직 산나물은 이르다. 새싹은 볕이 곱게 들어와 앉는 들에서부터 움튼다. 쑥은 이때의 전령이다. 쑥은 겨울 막바지에 이미 머리를 살짝 내밀고, 어느새 덜 풀린 땅을 풀빛으로 물들인다. 그 봄기운을 음식으로 옮기는 방법이 문헌 곳곳에 남아 있다. 그 가운데 19세기 말 쓰인 <시의전서(是議全書)> 속 ‘애탕’ 항목은 봄노래처럼 경쾌하다. “세말춘초(연말과 새봄 사이)에 움 돋는 쑥을 뜯어다 깨끗이 다듬고 씻어 한 줌만 다진다. 소고기는 한 줌 부피가 되게 다져 쑥 다진 것과 합하여 기름장·양념을 갖춰 넣어 주물러서 밤만큼 환(丸·완자)을 만든다. 계란은 깨어 풀어 놓고, 장국이 팔팔 끓거든 환에 계란을 묻혀 넣는다.”
‘애탕’이란 말이 낯선 분도 있겠다. 애탕은 쑥국이다. 쑥의 한자어가 ‘애(艾)’이다. 물쑥은 ‘누호(蔞蒿)’, 사자발쑥은 ‘사자족애(獅子足艾)’이다. <시의전서>에 보이는, 맑은장국에 쑥과 고기를 섞어 치댄 완자를 띄우거나 그 완자에 밀가루 또는 녹말을 묻혀 굴린 만두로 해서 띄우는 방식은, 서울에서 애탕이라는 말과 함께 이어지고 있다. 애탕 항목의 나머지는 이렇다. “북어 껍질도 가시 없이 깨끗이 씻어 함께 넣어서 두어 그릇가량으로 끓인다. 또는 환을 하지 않고 혼합하였다가 장국이 끓을 때 수저로 똑똑 떠 넣으면 덩이덩이 된다.” 이 문장을 보니 북어 또는 명태 껍질로 육수를 내고 소고기로 맛을 더한 ‘어글탕’이 떠오른다. 20세기 전반의 한식을 정리한 선구자 방신영·조자호 같은 분들의 조리서에도 애탕과 어글탕 둘 다 실려 있다. 예전에는 북어 껍질이 육수의 바탕으로 널리 쓰였나 보다. 그러고 보니 장계향(1598∼1680)이 쓴 조리서 <음식디미방>의 방식도 새삼스럽다. 장계향은 쑥국에 마른 청어를 썼다. “정월과 2월 사이의 쑥을 간장물에 달이고, 꿩고기를 잘게 다져 달걀에 기름을 놓고, 마른 청어를 잘게 뜯어 넣어 끓이면 매우 좋다.” 쑥은 생선과 정말 잘 어울리는 봄나물 아닌가. 이맘때 남해 바다에서 들려오는 도다리쑥국 소식은 봄날의 진객이다. 생선뿐만이 아니다. 강원, 영남 내륙에서는 쑥콩탕이 새봄의 별미다.
국탕이 다겠는가, 쑥의 변신은 무궁무진이다. 흰밥 뜸들일 때 쑥을 살짝 얹어 그 향과 빛깔이 감돌게 짓는 쑥밥, 소박한 가운데 봄빛을 살린 쑥개떡과 쑥찐빵, 한 해에 가장 먼저 먹는 범벅인 쑥범벅, 범벅보다 더 본격적으로 찌는 쑥설기와 쑥시루떡, 쑥과 어울린 쌀의 풍미가 일품인 쑥절편 등 저마다 소담하다. 한껏 화려하게 쑥을 쓴 별미라면 쑥굴레, 애경단(艾瓊團) 등 별명도 많은 쑥굴리를 빠뜨릴 수 없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쑥굴리는 대체로 팥·밤·계핏가루·꿀 등으로 소를 만들어 넣고 둥글게 빚은 쑥찰떡에 고물을 묻힌다. 고물을 묻힐 때에는 겉에 다시 꿀이나 조청을 두르기도 한다. 고물도 마음먹고 화려하게 쓴다. 대추채·밤가루·잣가루·깨소금·거피팥가루·녹두앙금 등 손 쓰는 대로 온갖 연출이 가능하다. 생강이나 유자청으로 마무리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의 요리인 이용기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쑥굴리 항목에서 이렇게 말했다. “봄철에 먹으면 봄소식도 반가우려니와 향기로운 맛이 극히 담(淡·산뜻)하니라.”
아, 기다리기 지친다. 봄소식 맞으러 가야겠다. 뻑적지근하게 서울식 애탕 끓이기도 번거롭다. 어느 집에서나 하던 방식을 떠올린다. 쌀뜨물에 된장 잘 걸러 옅게 풀고, 새로 난 쑥을 담뿍 넣어 끓인다. 애탕은 애탕이고, 그저 집집마다 이렇게 쑥국을 끓였다. 이 수더분한 쑥국 한 사발이 ‘극히 담한’ 봄날과 오히려 더 잘 어울리겠다. 여기에 쑥밥을 곁들이겠다. 이렇게라도, 기어코 내편에서 봄을 맞아야겠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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