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배재·세화고, 자사고 취소는 위법"
서울 배재고와 세화고가 2019년 서울시교육청의 자율형 사립고(자사고) 지정 취소 처분에 불복해 제기한 1심 소송에서 승소했다. 지난해 12월 부산지법이 “부산시교육청의 해운대고 자사고 지정 취소는 위법하다”고 첫 판결을 내린 데 이어 서울행정법원도 서울시교육청의 자사고 지정 취소에 대해 같은 판단을 내린 것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는 18일 배재·세화고 학교법인이 서울시교육감을 상대로 낸 자사고 지정 취소 처분에 대한 취소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서울시교육청이 중대하게 변경된 평가 기준을 소급 적용한 것은 자사고 재지정 제도의 본질에 어긋난다”며 “이는 재량권을 일탈, 남용한 위법한 행정 조치”라고 밝혔다.
앞서 2019년 7월 서울시교육청은 배재·세화고를 비롯해 자사고 8곳에 대해 “운영 성과 평가 결과 기준 점수에 미달했다”며 자사고 지정 취소를 결정했고, 교육부는 이를 승인했다. 당시 서울시교육청은 자사고 재지정 기준 점수를 60점에서 70점으로 높이는 등의 평가계획을 2018년 12월에 내놓고, 평가 대상 기간인 2015∼2019학년도 전체로 소급 적용했다. 이에 반발해 자사고들은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 판결로 배재고와 세화고는 자사고 지위를 유지하게 된다. 이번 판결 취지를 감안하면 서울 숭문고·신일고 등 1심 판결을 앞둔 서울 소재 자사고 6곳도 승소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다만 법원 판결과 무관하게 정부는 2025년에 자사고를 일반고로 일괄 전환할 방침이다.
서울시교육청은 18일 서울행정법원 판결 직후 “고교 교육 정상화에 역행하는 퇴행적 판결에 강력한 유감을 표한다”는 입장과 함께 항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은 문재인 정부의 핵심 교육 정책이고, 고교 교육 정상화를 요구하는 시민 열망을 담은 것”이라며 “이를 무위로 돌리는 이번 판결에 대해 강력한 유감을 표한다”고 말했다. 이에 교육계에선 “무리하게 ‘자사고 죽이기’에 나섰다 위법 판단을 받았는데 법원 판결을 퇴행적이라고 비난한 것은 지나치다”는 반응이 나왔다.
◇“자사고 평가에 혁신학교 기준 적용”
이번에 법원이 서울시교육청의 자사고 지정 취소에 제동을 건 가장 큰 이유는 서울시교육청이 평가 기준을 갑자기 바꾼 뒤 이를 소급해서 적용했기 때문이다. 앞서 2018년 말 교육부와 일부 시·도교육청들은 자사고 평가 지표 표준안을 공동 개발해 재지정 기준 점수를 ’60점 이상'에서 ’70점 이상'으로 높이고, 교육청 감사로 감점할 수 있는 점수를 3점에서 12점으로 대폭 늘렸다. 자사고 폐지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교육부와 좌파 성향 교육감들이 자사고를 ‘일반고 황폐화’의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평가 기준을 강화한 것이다. 이에 당시부터 ‘자사고 죽이기'란 비판이 나왔다. 실제로 서울시교육청의 평가 결과 서울시 자사고 13곳 중 8곳이 총점 70점에 미달해 자사고 지정이 취소됐다.
재판부는 또 서울시교육청이 자사고의 지정 목적과 관련성이 떨어지는 재량 지표를 설정하고 자사고에 불리한 평가 요소를 넣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시교육청은 ‘학부모 학교 교육 참여 확대 및 지역 사회와의 협력’을 지표로 제시하고 학부모 동아리 활성화 등 평가 요소 7개를 넣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자사고 지정 목적 달성 여부와 관련성이 높다고 보기 어려울뿐더러, 오히려 서울시교육청이 추진하는 ‘서울형 혁신학교 운영 기본계획’과 흡사한 내용”이라고 했다.
또 시교육청은 기존에 자사고가 높은 점수를 받아온 ‘학교 만족도’ 평가 영역은 배점을 15점에서 8점으로 대폭 축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판부는 “자의적으로 평가 기준을 수립한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자사고를 평가한다면서 엉뚱한 평가 기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경회 성신여대 교수는 “교육 당국이 ‘자사고 폐지’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평가 기준과 배점까지 무리하게 바꿔가며 부당한 평가를 한 것은 법적으로는 물론이고 교육적으로도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자사고연합회 “직권 남용 책임 묻겠다”
2019년 시교육청의 지정 취소 통보 이후 자사고들은 학교 운영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시한부 학교’란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서울 등 대부분 지역의 자사고는 지원자 가운데 면접을 거쳐 신입생을 선발한다. 그런데 지정 취소 처분이 내려진 후 신입생 뽑기가 더 어려워졌고, 재학생마저 이탈하는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이에 일부 자사고는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1심에서 승소한 고진영 배재고 교장은 “이번 판결로 ‘자사고 탈락한 학교’라는 오명을 벗길 기대한다”며 “서울시교육청이 학교를 상대로 항소해 혈세를 낭비하고 행정력을 낭비해 대단히 유감스럽다”고 했다. 오세목 자사고공동체연합 대표는 “교육청의 위법하고 부당한 평가와 관련된 당사자들의 직권 남용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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