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신사임당'[횡설수설/이은우]

이은우 논설위원 2021. 2. 19. 03:01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의 마크 카니 총재는 2016년 6월 기자회견장에 물을 채운 유리컵을 가져다 놓았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5파운드 지폐를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물감이 든 컵에 담갔다가 뺐다.

그래도 지폐는 멀쩡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의 마크 카니 총재는 2016년 6월 기자회견장에 물을 채운 유리컵을 가져다 놓았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5파운드 지폐를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물감이 든 컵에 담갔다가 뺐다. 돈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영상도 소개했다. 그래도 지폐는 멀쩡했다. 이렇게 내구성 좋은 지폐를 만드는 것은 각국 발권 당국의 목표 중 하나다. 한국도 해외 40개국에 수출할 정도로 돈을 잘 만든다. 하지만 오래가게 만들면 뭐하나. 돈은 시중에 돌지 않으면 제 역할을 못 한다.

▷지난해 한국 지폐 환수율이 관련 통계를 만들기 시작한 1992년 이래 최저인 40%로 떨어졌다. 지폐 10장을 찍어내면 4장만 환수되고, 나머지 6장은 장롱이든 금고든 어딘가 꽁꽁 숨어버리는 것이다. 직전인 2019년 환수율이 71.3%였으니 거의 반 토막이 됐다. 지폐 중에는 5만 원권의 환수율이 24.2%로 가장 낮았다. 지난해 추석 무렵엔 5만 원권 품귀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중에 돌아야 할 돈이 사라지면 비용을 들여 또 화폐를 찍어야 한다.

▷한국은행은 환수율 하락 이유로 코로나 사태와 저금리를 지목했다. 코로나 사태로 현금 거래가 많은 대면 소비가 크게 줄었다. 지폐가 환수되는 주요 경로가 ‘대면 서비스업→시중은행→한국은행’인데 이 고리가 시작점부터 위축된 것이다.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예비용 현금을 쌓아두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저금리 탓에 은행에 맡겨봐야 이자가 거의 없는 것도 현금 보유를 증가시킨 요인으로 꼽힌다.

▷코로나 사태와 저금리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그런데도 유독 한국만 지폐 환수율이 크게 떨어졌다. 최고액 지폐 환수율을 보면 미국이 70%대 후반이고, 유럽은 90%를 웃돈다. 이 때문에 탈세 등 불법거래와 연관이 있을 것이란 추측이 많다. 실제 상속세를 피하려고 지폐를 모으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최고 세율 50%인 상속세를 피해 현금을 자녀에게 물려주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정용 금고 판매가 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전자 결제가 일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현금을 쓰는 일이 줄고 있다. 게다가 디지털 화폐도 선보이고 있다. 디지털 화폐는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와 달리 중앙은행이 발행하는데 중국은 이미 디지털 위안을 실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전담조직을 꾸리고 선행 연구에 나섰다. 디지털 화폐는 코로나 등 전염병의 매개체가 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로 탈세나 돈세탁을 억제할 수도 있다고 한다. 첨단 기술 덕분에 ‘잠자는 신사임당’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올 수도 있겠다.

이은우 논설위원 libra@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