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고 그름' 아닌 '싫고 좋음' 놓고 여론전..소송 남발·판결 불복, 정치권의 책임 크다"
[경향신문]
정치 보복 위해 고소·고발
사법부 독립성 침해 받아
정치권 ‘미래’ 보고 개혁해야
이슈에 ‘중립’ 역설적 존재감
‘격동(激動)’이란 수식어와 늘 잘 어울렸던 한국 현대사이지만 법조계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특히 격동의 시간을 보냈다. 검찰과 법원을 향해 ‘영웅’ 혹은 ‘적폐’라는 양극화된 평가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이찬희 대한변호사협회장(56)은 철저한 중립을 유지해 역설적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평가받는다. 오는 23일 퇴임을 앞두고 이 회장은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대한변협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양극화된 여론지형에는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며 “단번에 개혁을 이뤄내겠다는 조급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문했다.
퇴임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 회장은 “하얗게 불태웠다”고 답했다. 집무실 책장에 꽂혀 있는 일본 만화 <내일의 죠> 대사로 에너지를 남김없이 쏟아부었다는 의미이다. 2019년 2월 취임한 이 회장은 “이슈가 생길 때마다 ‘변협은 누구 편이냐’ ‘입장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아왔다”고 말했다. 새벽 4시에 전화가 올 때도 있었다. 이 회장은 어떠한 정치적 입장도 밝히지 않음으로써 논란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초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으로 변협이 추천한 김진욱 처장이 임명된 것은 이 같은 행보의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는 “중립적 행보로 협회 안팎에서 신뢰를 쌓고 공수처 출범에 역할을 하게 된 것에 보람을 느낀다”면서도 “법조계 전체가 신뢰를 잃는 과정을 보게 돼 대단히 마음이 무거웠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를 계기로 진영 갈등의 양상이 바뀌었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좋고 싫음’을 두고 다툰다. 그래서 사법부의 최종 결정에도 승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좋고 싫음’을 두고 다투는 대표적 대상이다. 그는 윤 총장에 대해 “단일한 조직체로 검찰을 이끌고 싶어하는 수장 이미지가 있지만 검찰의 권한을 쪼개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고 관련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좋고 싫음’을 둘러싼 갈등에 정치권이 앞장선다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꼽았다. 그는 “정치인들이 상대방을 괴롭히는 수단으로 고소·고발을 남발하고 결과가 나와도 승복하지 않으며 판사 비난에 앞장선다”면서 “과거에는 싸우더라도 흉터는 안 남게 서로 따귀를 때리며 싸웠다면 지금은 얼굴을 할퀴면서 싸운다. 흉터가 남아서 화해는 불가능하고 보복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싸움만 벌어진다”고 말했다. 보복의 도구로 사법을 활용하면서 사법부의 독립성이 침해받는다는 설명으로 이어졌다. 이 회장은 “사법부마저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되면 우리 사회는 갈등 해결의 기반이 없어지고 끝이 없는 분쟁만 남는다”며 “정치권이 미래를 보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법조인으로서 가장 안타까운 최근 이슈는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사표 수리 관련 김명수 대법원장의 거짓 해명 논란이다. 그는 “대법원장이 국회 눈치를 본다는 사실이 부적절하지만, 누가 눈치를 보게 했는지 따져볼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법원행정처 폐지 등은 입법이 안 돼서 불가능하다. 판결문 공개 확대, 법관인사에 변호사 평가 반영, 전자소송 확대, 전용차량 등 법원장 특권 페지 등도 중요한 개혁”이라며 “가시적 성과물만 중요시하는 풍토에서는 이런 개혁이 저평가받고, 급하게 만든 법안들이 주목받는다”고 말했다.
최근 여당이 추진하는 검찰의 수사와 기소의 완전 분리를 위한 중대범죄수사청 설립 추진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우려를 표했다. “수사 견제라는 점에서 이상적이지만 수사와 기소, 나아가 재판까지 늦어질 수 있다”며 “우리 국민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지 논의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지게 만드는 개혁은 없다. 제도는 시간이 걸려도 충분히 논의해 현실을 고려해 만들고, 문제점이 생기면 조금씩 업데이트해 나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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