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40] 각하, '태조 왕건' 83화를 보시옵소서

정상혁 기자 2021. 2. 18.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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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언한 승려 처형한 폭군 궁예, 對언론 '징벌적 손해배상' 떠올라
대신들 눈 질끈 감고 자리 보전.. 궁예는 길바닥서 백성 손에 죽었다
드라마 '태조 왕건' 83화 속 폭군이 된 궁예(위)와 그에게 간언하다 죽임당하는 승려 석총. /KBS

“저 자는 지금 마구니의 더러운 입으로 중얼거리고 있다…. 내군들은 무엇을 하느냐? 저 입을 철퇴로 으깨주어라.”

이 장면은 KBS 드라마 ‘태조 왕건’ 83화에서 미륵을 자처하며 ‘쇼’를 벌이던 궁예가 입바른 소리를 한 승려 석총을 처형하는 장면이다. 일개 백성은 죽기를 각오하고 일인자에게 고한다. “소승은 어려서 불문에 입문하여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미륵만 배워왔사오나 폐하와 같은 미륵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오늘날 거짓을 말하고 계시오이다. 낙원도 없고 극락도 없소이다. 거리엔 굶어 죽은 시체들과 오갈 데 없는 백성들이 유리걸식하고 있소이다.”

나는 아직도 이 드라마를 밤마다 케이블채널에서 재방송으로 다시 보곤 한다. 이것은 사극(史劇)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풍자극이다. 20년 전 방영돼 시청률 60%를 넘긴 이 드라마는 여전히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순위 상위권에 포진해있고, 인기에 힘입어 유튜브 전 회차 유료 생방송이 진행되기도 했다. “200화 전체를 서른 번 넘게 봤다”는 가수 박완규뿐 아니라, 만화가 기안84 등 연령을 초월해 광팬 인증이 속출한다. 공영방송에서 대하 사극이 실종돼 볼거리가 줄어든 탓도 있을 것이나, 당대와의 시차 없이 정확히 권력의 속성을 겨누는 스토리텔링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에게 절대성을 부여하던 궁예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자제 잃은 모든 권력의 끝은 이와 같을 것이다. /KBS

특히 83화는 이미 정신이 돌아버린 궁예와 간언하는 석총의 긴장 구도 탓에 특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최근 여당에서 ‘가짜 뉴스’ 운운하며 징벌적 손해배상 대상에 언론사와 포털 사이트를 포함하는 입법 진행 소식이 나온 직후인지라 불현듯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석총은 외친다. “조정에 사악한 간신들만 들끓고 있으니 어찌 폐하의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막히지 않겠사옵니까…. 폐하, 나라가 이미 깊이 병들어있사옵니다. 백성들은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옵니다. 아직도 저 요원한 ‘북방(北方)의 세계’를 논하지 마시고 죽어가는 백성과 나라를 구하시옵소서. 그 길만이 살길이옵니다…. 더 이상 백성을 속이지 마시옵소서!”

철퇴를 맞고 쓰러져 피투성이가 된 석총보다 보기 괴로운 것은, 궁예가 정상이 아님을 알면서도 참담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를 숙이는 고관대작들이다. 그들은 그저 눈을 질끈 감음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보전한다. 죽기 전 석총은 마지막으로 내뱉는다. “거짓 미륵이시여, 그대의 세상은 이미 끝났소이다. 이미 새로운 미륵이 나타나 내일의 세상을 준비하고 있소이다. 거짓 미륵이시여, 저주를 받을 것이외다.”

‘태조 왕건’의 주인공은 물론 왕건이지만, 실상 드라마 정국을 주도하는 건 궁예다. 드라마는 그의 광기를 통해 말세 의식 속에서 태어난 권력, 종교로서의 정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드러낸다. 궁예는 애꾸이고, 한 쪽 눈으로 세상을 본다. 이는 지도자로서의 치명적 약점을 상징한다. 그리고 되레 비판 세력을 꾸짖는다. “네가 까막눈이기 때문이다. 봉사가 되었기 때문이야.” 궁예를 연기한 배우 김영철은 “원래 양쪽 모두 시력이 2.0이었는데, 궁예 안대 분장 탓에 한쪽 눈의 시력이 0.2까지 떨어졌다”며 “그 후 회복이 안 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이 나는 정사(政事)와 관련한 고도의 은유처럼 느껴진다.

궁예는 116화에 이르러 죽는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어. 인생이 찰나와 같은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욕심을 부렸을꼬? 흐흐흐…. 이렇게 덧없이 가는 것을. 이렇게 가는 것을….” 드라마는 그의 최후를 아름답게 포장한다. 중역(重役)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길바닥에서 백성의 손에 명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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